〈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 이 고약한 제목의 책은 한국에서 26년 동안 살아온 ‘한국인을 가장 많이 아는 일본인’이 쓴 한국 비판서다. 이 책은 당시 솔직하고 거침없는 비판으로 국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99년 처음 출간됐을 때 나도 사서 읽은 기억이 난다. 과연 이 책에서 비판하는 내용이 모두 타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 지은이(이케하라 마모루)가 지적한 많은 부분은 그 후 한국 사회가 발전하면서 저절로 해결되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지적한 일부 비판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중의 하나가 공직사회의 부패 문제다. 그는 신문 인터뷰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한국 비판을 늘어놓았는데, 그중에서 뭐가 가장 문제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한마디로 한국은 무법 국가다. 늘 부정부패를 없애자고 말하지만, 소용없는 건 법을 지키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재수가 없어 법에 걸리고, 재수가 없어 뇌물 먹다 잡혔다고 말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세계 최고의 교육수준을 자랑하는 한국의 준법정신은 아프리카만도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뇌물을 받아 교도소에 갔다 온 사람들이 버젓이 국회의원으로, 지방자치단체장으로 당선되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일본 공무원 사회에서는 뇌물을 받았다가 발각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고리를 끊어 버린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부정비리사건이 터지면 굴비 두름처럼 줄줄이 엮여 올라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의리 있는 것일까. 평소에는 꼬박꼬박 형님, 형님 하다가도 자기 상사 앞에 가면 갑자기’이케하라 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할 때에만 ‘형님’일 뿐 그렇지 않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는 공직사회의 부패를 이렇게 꼬집는다. “공직자의 부정부패가 심하다. 공무원이 법을 어기면 정말 엄벌에 처해야 한다. 국가는 공권력의 중립성을 철저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법을 어긴 사람들을 엄격하게 처벌할 수 있고, 처벌받는 사람도 이를 달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선량한 시민이 법 위반을 하지 않도록 잘못된 제도와 시스템은 빨리 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억울한 범법자가 넘쳐날 것이고, 국민들은 법을 무시할 것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국회의원 가운데 ‘전과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대한민국만큼 높은 나라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뼈아픈 지적이다. 유사 이래 수없이 반복되었던 국가들의 흥망성쇠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국가 멸망의 내적 요인으로 부정부패가 가장 대표적으로 지목된다. 한 나라의 발흥기에 확립된 국가기강은 태평성대를 거치면서 느슨해지다가 말기에 이르러서는 문란해지며 국가를 흔드는 가장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정치 지도층의 부패는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사회 통합을 저해하며, 부정부패를 방치하거나 오히려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나라를 쇠퇴하게 만드는 지름길이 된다. 이처럼 ‘부패’가 망국의 원인이라는 것을 대부분 사람들은 다 잘 안다. 역사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청나라가 망하고, 장제스 국민당 정권이 망하고, 조선이 망한 가장 큰 까닭이 ‘부패’라는데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 ‘부패’가 개선되지 않는 것은 ‘나는 아니다’, ‘내 가족은 아니다’, ‘우리 집단은 아니다’라는데 근본 이유가 있다. 정치인은 ‘부패 백화점’의 단골손님이다. 그들은 천하의 공물인 대한민국을 자기네 패거리의 사유물로 포획해 독점하려 한다. 작은 도둑은 처벌받는데 큰 도둑이 더 큰소리치고 활개 치는 세상이 우릴 더욱 허탈하게 한다.
미국의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인공지능(AI) 설계자 8인을 선정했다. AI가 등장하면서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AI가 부패의 감시자가 될 수 없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보지만, AI가 오히려 부패의 조력자로 악용될 위험성도 있다니 내 생전에 부패 없는 청정세상의 꿈은 기대난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영예의 (?) ‘올해 인물’은 누가 되었을까? 어느 칼럼니스트는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 씨를 ‘올해의 인물’로 꼽았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올해 대통령 된 사람도 있고,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지만, 시대를 상징하는 면에서 만배 씨와 겨룰 수 없다. 그가 다윗도 아니고, 대한민국이 골리앗도 아니지만, 둘의 대결은 성서 속 그 유명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거인을 쓰러뜨린 다윗의 무기는 돌멩이 하나였다. 만배 씨가 가진 무기도 입(口) 하나다. 그는 입을 벌릴 필요도 없었다. 입을 열기 전에 국가가 먼저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김만배 씨는 이재명 대통령에게 ‘대장동 대통령’이란 딱지를 붙였다. 그렇게 간(肝) 큰 사람은 그 말고는 없다. 김만배 씨를 ‘올해의 인물’로 추천하는 이유다.”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꽃다운 이름과 그 향기는 백년을 가지만, 더러운 이름과 그 악취는 만년을 간다’는 말이 있다. 향기로운 사람이 그립다. 얼마 전 작고한 이순재는 사람은 크게 세 부류라고 말했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한국 사회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 그를 만들었다.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많은 나라가 좋은 나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