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안동시 정상동 택지개발지구에서 이름 모를 무덤을 이장하는 중에 미이라 한 구가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시신을 보호하는 외관을 보고 최근의 무덤이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발굴작업이 진행되자 400여년 전 조선시대의 무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덤 속에서 온전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옷가지와 여러가지 소품들 중에 요절한 남편을 그리는 애절한 사연이 담긴 아내의 편지와 남편의 회복을 기원하는 미투리가 발견되었다.
남편이 젊은 나이(31세)에 병석에 눕자 아내(원이엄마)는 남편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엮어 정성껏 미투리를 삼았다. 그러나 남편은 그 신을 신어 보지도 못한 채 끝내 저 세상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며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 해로하고자 소망했던 이들 부부의 육신은 비록 떨어져 있을지언정 영혼은 지난 세월 동안에도 줄곧 함께였다. 긴 어둠의 세월 속에서 사랑을 지켜온 것은 아내가 써서 남편의 가슴에 고이 묻어둔 마지막 편지였다.
“원이 아버님께 올림.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 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드립니다. ”
다산 정약용은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다산은 스물두 살에 소과 시험인 생원시에 합격, 스물여덟에는 대과인 문과에 급제했다. 정조 임금의 신임까지 얻었으니 그의 앞날은 푸른 하늘처럼 높고 맑기만 했다. 그런데 서른아홉 살 때부터 정약용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정조의 새 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는 손자가 죽은 뒤 노론과 손잡고 정조시대의 개혁을 파괴했다. 이 때문에 정조의 측근들은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었다. 정약용도 그런 표적이었다. 정조의 시신이 땅에 묻히고 얼마 뒤인 순조 1년 2월 8일 새벽, 정약용은 자택에서 의금부 관리들에게 체포되었다. 죄목은 ’서학쟁이‘였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였다.
이렇게 시작된 정약용의 유배생활은 무려 18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마재에서 홍 씨 부인은 시어머니를 모시며 지아비 없는 허전한 집을 지키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다산이 장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기를 “찾아오는 손님에게 머리 잘라 술상 차렸고 늙은 시 부모님께 방아를 찧어 즐겁게 해드렸다지.” 했는데 친정어머니의 그 고운 심성을 홍씨 부인이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홍씨는 누에치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시를 지어줄 정도로 다정했던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고 왔던 여섯 폭 다홍치마를 보내왔다. “그대와 이별한 지 7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니…남쪽으로 내려가 끼니라도 챙겨드리고 싶으나 해가 저물도록 병이 깊어져 이내 박한 운명 어쩌리까. 이 애절한 그리움을…”
은은한 매화 향기에 취해 쓸쓸한 유배 생활의 위안을 삼고 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한 마리 새가 정원의 매화나무에 앉는 것을 보고 다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부인이 혹 새가 되어 날아온 것은 아닐까? 지필묵을 꺼낸 다산은 몇 해 전 부인이 인편에 보내온 시집올 때 입었던 색 바랜 다홍치마를 꺼내 그 위에 애절한 마음을 그리고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다산은 고이 간직했던 아내의 ’노을빛 치마‘를 잘라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간곡한 당부를 담아 4권의 서첩으로 만들어 ’하피첩(霞帔帖)‘이라 이름 짓고 마재마을로 보냈다. 하피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이다.
다산은 서문에 책을 만든 사연을 이렇게 적었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를 보내왔네. 천 리 먼 길 애틋한 마음을 담았네. 잘라서 작은 서첩을 만들어 그나마 아들들을 타이르는 글귀를 쓰니 부디 부모 마음을 잘 헤아려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기려무나. 지금은 비록 폐족이지만 선량하게 살아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으니 화평과 효심, 안목을 키우라. ” 대학자이기 이전에 평범한 아비의 자식 사랑이 담긴 글이 가슴 찡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다산은 결혼 60주년을 3일 앞두고 아내에게 바치는 회혼시 한 편을 썼다. 그러나 회혼일 아침에 다산이 세상을 떠나게 되며 회혼시는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이 시에는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신혼처럼 부인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육십년 세월, 눈 깜짝할 사이 날아갔는데도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살아 이별하고 죽어 헤어짐이 이 사람을 늙게 재촉하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이 밤 목란사 소리는 더욱 다정하고 그 옛날 치마에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오…”
다산 부부의 편지는 화려한 문장도, 거창한 약속도 없다. 다만 멀리 귀양 간 남편을 향한 그리움과 걱정, 그리고 끝내 함께 늙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슬픔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 소박한 마음이 오히려 더 깊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세월이 흐르고 얼굴에 주름이 깊어질수록,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르기보다 등불처럼 잔잔히 오래 빛나는 것임을 다산 부부는 삶으로 말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깨닫게 된다. 사랑이란 결국, “당신과 함께한 시간이 내 삶의 가장 따뜻한 시간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긴 세월의 동행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