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라배마 남부 오렌지 비치의 해변에 도착하니 푸른 하늘아래 끝없이 펼쳐진 하얀 백사장이 뜨거운 햇살에 출렁이고 있었다. 올 여름 ‘할머니 캠프’에 참여한 두 손주들과 발가락을 간질이는 모래밭을 빠르게 뛰어서 물가에 발을 담겼다. 맑은 물이 옥 빛으로 환하다가 짙은 청색으로 깊이를 가늠하지 못해도 아이들은 겁내지 않고 바다에 안겼다. 열린 하늘과 따스한 바닷물, 여유와 평안속에 우리는 완벽한 순간을 잡았다.
큰딸네 8살 아이와 작은딸네 5살, 두 사내녀석이 물속에서 풀쩍 뛰며 파도를 타느라 행복한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며 오랜 세월 남부에 살면서 이 해변에서 만든 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렸다. 파도 타다가 얕은 물에서 고기잡이 하거나 모래성을 짓던 아이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즐거워 했다. 나는 아이들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이곳에서 놀았던 내 아이들의 아이들이 바다의 매력에 빠지는 것을 지켜봤다.
그런데 한 순간 내 기쁨을 앗아간 사건이 일어났다. 바닷물에 얼굴이 담겼던 큰아이가 눈이 따갑다고 다가와서 타월로 얼굴을 닦아줬다.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고 돌아보니 작은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설명할 언어가 없다. 좌우를 아무리 둘러봐도 아이는 없었다. 당황한 큰아이와 나는 동서로 흩어져 바다를 보고 해변가를 살피고 다녔지만 어디에도 작은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보고 아이를 찾게 해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하며 모래밭이나 바다, 다른 피서객들 사이로 붉은 수영복을 입은 작은아이를 찾느라 허둥거렸다.
가까이 있던 타워에 가서 라이프가드에게 실종된 아이의 인상착의와 수영복 색깔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라이프가드는 무전기로 모든 라이프가드에게 아이의 실종을 알리고 가까이 있던 노부부는 큰아이를 돌 봐주겠다고 나섰다. 신속하게 ATV를 타고 달려온 라이프가드가 나를 태우고 우선 해변의 동쪽으로 이동하며 나와 함께 작은아이를 찾았다.
몇 분 후 무전기로 한 어린아이가 서쪽 해안을 달리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정보를 받고 차를 서쪽으로 돌려 피서객들을 피하며 빠르게 달려갔다. 라이프가드는 계속 무전기로 정보를 받았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젊은 남자의 수고에 민망할 정도로 나는 패닉 상태였다. 만약에 아이를 찾을 수 없다면? 귀여운 아이를 다시 볼 수 없다면? 온갖 흉악한 상상이 나를 마비시켰다. 우리가 탄 ATV가 피서객들을 지나 사람들이 드문 해변을 달려가니 멀리 한 남자가 붉은 수영복을 입은 아이와 서 있었다. 내 손주였다!
그 순간, 정신을 차렸고 눈물이 났다. 아이를 덥석 안아 차에 태우고 꽉 껴안으니 아이는 오히려 의아해 했다. 왜 갑자기 사라졌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갈매기가 불러서 달리기 내기 했는데 내가 이겼다” 며 자랑스런 표정을 지었다. 나를 지옥에 보냈던 아이의 맹랑한 말에 놀라는데 아이는 “뛰면서 참 행복했다” 덧붙였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고 주위에 사람들이 없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즐거워 한 아이를 어떻게 이해하나?
라이프가드는 아이와 나를 큰아이가 기다리는 곳에 내려다 주며 “반 마일이 훨씬 넘는 거리를 뛰어간 놀라운 꼬마” 라며 주먹 악수를 했다. 그리고 주변의 피서객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아이를 찾은 것을 기뻐했다. 라이프가드들의 신속한 대응에 깊이 감사하고 둘러본 푸른 하늘과 바다는 더 이상 나에게 평화로운 환경이 아니었다.
오래전 나를 십년감수 시켰던 작은아이의 엄마, 둘째딸이 준 악몽을 다시 살았다. 6살이었던 딸을 디즈니월드에서 잃었다 찾았는데 그 딸의 아이가 다시 나를 십년감수 시킨 것이 우연인가? 강한 호기심과 풍부한 상상력이 모자의 DNA에 있다. 그때의 충격을 아직도 안고 사는 둘째딸이 아들의 실종사건을 알면 무슨 반응을 할지 눈에 선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영원한 비밀로 감추자고 큰아이와 단단히 약속했다. 그러나 저녁에 엄마와 화상 통화하던 아이가 갈매기와 가졌던 달리기 내기를 엄마에게 자랑하자 “달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조심하지” 걱정하는 딸의 목소리에 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손주를 잃었던 20분 조금 지났던 시간은 딸을 찾아 관광객들로 붐비던 디즈니월드를 3시간 헤맸던 적보다 더 강한 충격을 줬다. 훗날 이 아이가 성장하면 오늘 나를 혼란 시킨, 갈매기와 달리기 내기하느라 해변을 달린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