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로 가는 비행기가 대서양을 건널 적에 나는 영화 ‘The Opera!’를 봤다. 그리스의 신화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현대판으로 제작해서 2024년에 만들어진 뮤지컬 드라마는 상큼하고 재미있었다. 이승과 저승, 빛과 어둠에 멋진 음악이 어울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슬픈 스토리를 풀었다. 그렇게 고대나 현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로마는 사랑의 보고였고 곳곳에 잔재한 과거의 흔적은 타임캡슐 이었다. 로마 공황의 벽화에서 방문객들을 환영하던 소피아 로렌을 보니 그녀가 주연한 영화 ‘해바라기’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떠올라 시내로 향하던 택시안에서 가슴이 저릿했다. 고도시에서 2천년 전 막강한 로마제국이 유럽을 제압했던 찬란한 영광을 상상하는데 셰익스피어의 작품,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열정적인 사랑이 떠올랐고 더불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절절한 사랑도 생각났다.
로마 사랑은 음식을 통해서도 찾아왔다. 피아노를 연주하며 감미로운 노래로 감칠맛을 보탠 재즈 음악가와 인사하며 부드러운 스테이크와 파스타가 잘 어울려 좋아한 남편의 만족한 표정과 진짜 피자와 파스타를 먹는다며 흥분했던 손주의 해맑은 웃음, 신선한 생선구이에 반한 딸과 무한정 젤라토와 티라미수를 구해준 사위, 라이스 고로케인 수플리에 반했고 구운 가지와 채소요리 치커리가 한국의 나물무침 같아서 맛있게 먹으면서 행복했던 내 마음에 로마 사랑이 있었다.
사위와 손주가 스쿠터를 타고 로마 시가지를 누비고 다닐 동안 나머지 가족들은 발로 찾아 다녔다. 덥고 힘들어도 잘 걸어주던 남편은 일식집을 보자 얼른 들어갔다. 사시미와 야끼소바에 카레까지, 인상 좋은 일본남자의 손맛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로마인들이 휴가를 간다는 8월 더위에 오페라 하우스도 휴가였다. 그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딸이 오페라 하우스 가까이에 있는 Episcopal 교회에서 가지는 Opera Concerto 를 예약한 덕분에 서운하지 않았다.
로마에서의 마지막 날, 소문난 맛집에서 저녁을 먹고 공연을 보러 갔다. 오케스트라가 ‘나부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연주하자 그 곡을 앞에 앉은 손주에게 소근소근 소개하는데 옆에 앉았던 남편이 나에게 기울었다.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땀을 흘렸다. 괜찮다면서도 괴로운 표정을 짓는 남편을 보며 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저녁 식사하며 포도주를 여러 잔 마신 남편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해도 나는 남편의 땀을 닦아주며 계속 부채질했다. 나의 불안이 전해졌는지 앞에 앉았던 딸과 사위는 계속 뒤돌아보며 상황을 살폈다. 미안함보다 든든했다.
괴로워하는 남편 옆에서 불안한 생각에 잡혀 있는 동안 베르디, 푸치니, 모차르트와 로시니의 아름다운 아리아는 멀찍이 있었다. 중간 휴식시간에 뒷자리의 여자가 다가와 남편의 맥박을 재며 자신은 의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평소에 무슨 지병이 있느냐고 묻자 내 입에서 “모두 다 가졌어요” 라는 답이 나왔다. 당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혈압문제인지 모르지만 고통을 받던 남편은 딸이 준 사탕을 입에 물고 찬 물을 마신 후 괜찮다며 의자에 바르게 앉았다. 대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고해성사도 받았는데 마침 뒷자리에 의사가 있었으니 분명 우리는 축복을 받았음에 감사했다. ‘만약에’ 라는 온갖 상상이 몰아왔던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니 주옥 같은 아리아의 사랑타령이 가슴에 안겼다.
공연이 끝나자 남자 셋을 택시에 태워 먼저 숙소로 보내고 나는 딸과 로마의 밤거리를 걸었다. 잠시 내 마음속에 일었던 폭풍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낮의 열기가 식은 밤 공기는 맑았다. 어둑한 뒷골목에 인적이 드물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마른 잎들이 흩어진 가로수 길가에서 가을의 입김을 느끼다 열려 있던 젤라토 가게에 들어갔다. 지역 이름이 붙은 아라비아 커피와 마세도니아 과일로 만든 젤라토를 골랐다. 입안에서 머물던 차고 달콤하던 이국적인 맛은 로마에서 만든 많은 추억의 순간들과 뒤섞이며 행복한 기운을 내 안에 퍼뜨렸다.
“대서양을 건너며 오페라 영화를 보고 왔는데 로마의 마지막 저녁에 오페라를 듣게 되어 좋았다” 하니 딸이 밝게 웃었다. 그렇게 세상의 많은 종류의 사랑이 씨줄과 날줄로 화음을 이룬 환경에서 성지를 순례하고 멋진 휴일을 보낸 것에 감사했다. 잠시지만 영원한 사랑의 도시 로마에 푹 빠져서 매 순간을 사랑했던, “카르페 디엠!” 을 실행한 내 자신에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