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우리 부부는 큰아들네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연휴를 보냈다. 아들네는 몇 년 뒤 은퇴한 뒤에도 계속 살 집이라며 뉴저지 포트리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거기서 연말을 보내면서 ‘시골 영감 서울 구경’이라는 생각이 떠 올랐다.
온 가족이 함께 음식점에 갈 때도 우리는 차를 타는 대신 가까운 거리를 걸었다. 큰손녀와 단둘이 데이트하듯 점심을 먹으러 갈 때도, 다방에 갈 때도, 큰아들이 좋아하는 찻집과 핑퐁을 치러 갈 때도 걸어서 갔다. 미국 여러 곳에서 살아 보았지만, 식당·체육관·찻집을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은 그곳이 처음이었다. 아들의 친구들이 근처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왜 그곳을 은퇴 후의 보금자리로 골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집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디너 테이블에는 모두 열두 명이 둘러앉았다. 해군 장교인 큰손녀의 친구들 셋, 대학원에 다니는 작은손녀의 친구 하나, 아들과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동료 둘, 그리고 아들 부부와 우리 부부였다. 아들 부부와 우리를 제외하면 모두 미혼이었고, 남자는 큰손녀의 보이프렌드와 아들, 그리고 나까지 셋뿐이었다. 식탁은 젊은 아가씨들의 웃음과 재치 있는 대화 소리로 차고 넘쳤다.
음식과 음료는 풍성했고, 웃음과 대화는 멈출 줄 몰랐다. 나는 아들과 함께 병원에서 일하는 물리학자 첸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중국 본토에서 미국으로 유학 와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는 방사선종양 전문의인 아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중국이 공산 국가이지만 현실에서는 사유 재산이 허용되면서 빈부 격차가 크고, 늘어나는 가난한 노인들의 의료비와 생활비 때문에 여러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공산 국가에는 그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또 하나는, 중국이 1차부터 4차 산업혁명까지는 서양에 뒤처졌었지만,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한 5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들어서며 중국을 동양의 대표로, 미국을 서양의 대표로 들며, 이제야 동양과 서양이 균형의 시점에 도달했다고 그녀의 의견을 말했다.
크리스마스 저녁, 디너가 끝난 뒤 우리 부부는 침실로 물러났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젊은이들의 노래 소리와 웃음, 춤추며 지르는 신명 난 리듬과 고함이 벽 너머로 들려왔다. 그들의 크리스마스이브는 밤 11시까지 활기차게 이어졌다. 신나게 노는 그 모습을 떠올리니,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풀어내는 것 같아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웃에게 민폐가 되지 않는 환경이라는 점이 고맙게 느껴졌다.
다음 날, 밤늦도록 그렇게 신나게 놀던데 무엇이 제일 신났느냐고 큰손녀에게 물었다. 뜻밖에도 대답은 ‘강남 스타일’ 춤을 추며 즐겼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유학 온 여학생과 며느리가 앞장서 강남 스타일 춤을 리드하고, 다른 사람들은 리더를 따라 하며 즐겼다는 것이다. 그 춤을 전에는 한 번도 춰 보지 않은 큰손녀와 한국인이 아닌 다섯 명의 참가자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었고, 리듬과 박자를 함께 즐길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문득 우리 부부가 은퇴 후 애틀랜타에 정착할 무렵 친구 집 연말 파티에서 라인댄스를 밤늦도록 연습하던 때가 떠올랐다. 한국 최초의 체조 국가대표였던 분과 그분의 남편인 태권도 관장님이 함께 만든 ‘태권로빅’도 생각났다. 태권도와 에어로빅을 결합해 누구나 즐길 수 있고 몸의 건강을 돕는 태권로빅을 대중화·세계화하려 한다고 했는데, 그런 춤이 세계로 퍼져 많은 사람들이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고 건강을 찾는 데 기여했으면 좋겠다.
아들과 함께 갔던 핑퐁장도 기억에 남는다. 핑퐁장에는 관리인이나 주인이 없었다. 잠긴 문을 여는 것도, 장내의 음료와 간식 매장도 사람 없이 자동으로 운영되었다. 한 시간 운동을 하고 핑퐁장을 나올 때도 자동 결제를 마쳐야 문이 열리는 것이 새로웠다. 테슬라 공장들, 일본, 대만, 중국, 독일에 많은 공장들이 사람 없이 자동으로 운영된다고 하는 데, 사람도 불도 없는 공장에서 뚝딱뚝딱 물건을 만들어 쌓아 놓는 모습을 내가 본다면 얼마나 더 신기할 것인가? 세상은 빨리빨리 진화한다.
아들 부부는 새해에도 미 해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 친구 부부들과 크루즈 여행을 간다고 했다. 은퇴 연령이 가까워진 해사 친구들이 모두 중·상층의 미국 생활을 성공적으로 이어 가고 있다고 했다. 왜 해사를 보냈느냐고, 해사를 나오고 5년의 의무 복무 기간을 마친 뒤 의대를 가려던 아들이 시간을 너무 많이 허송했다며 항의했던 일이 떠올랐다. 해사는 입학도 어렵지만 고된 훈련 과정을 견디며 생존력과 리더십을 배우고 나면, 어떤 조건 속에서도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질 것이라고 믿었던 나의 생각이 별로 틀리지 않았구나 싶어 혼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