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 배우기 (50)
미국에 와서 살 동네를 정한 다음, 나는 조용한 도서관을 찾아다녔다. 영어로 듣기와 말하기는 되지 않지만 읽고 쓰기는 조금 되는, 한국식 영어교육의 수혜자로서 낯선 미국에서 할 일을 찾고 싶었다. 짧은 영어실력으로 그나마 수월할 것 같아 읽기 시작한 그림책들, 아이들 키에 맞춰 꽂힌 그림책을 도서관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그림책이라고 해서 문장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그림책은 시처럼 어려운 비유로 가득했고, 어떤 그림책은 미국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은어로 채워져 있었다.
수백 권의 그림책 속에서 한국 작가의 책이나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책을 발견하는 것은 보물찾기 같은 설렘을 주었다. 이 설렘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서 <그림책으로 인생 배우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벌써 50번째 글이다. 그림책을 읽을수록 책 속에서 한국을 찾는 설렘보다 그림책이 주는 따스함과 여유로움, 엉뚱함과 재기 발랄 같은 그림책만의 매력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글쓰기는 이제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그림이나 내 마음에 와닿는 주제가 중심이 되었다.
는 2019년 칼데콧 아너 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브라이언 라이스가 쓰고 그린 그림책이다. 이 책은 도서관 책꽂이 위에 트로피처럼 세워져 있었다.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책이나 유명한 도서 상을 수상한 작품을 전시하는 자리였다. 책을 펼치고 문장을 또박또박 읽다가 발견한 한 문장에 오래오래 눈길이 갔다.
‘A good place won’t stay empty for long. Something must grow’
‘좋은 곳은 오래도록 비어 있지 않아요. 반드시 무언가가 자라나지요.’
‘좋은 곳‘에 많은 단어를 넣어 보았다. 사람, 집, 나라, 세상…….’
그리고 좋은 곳을 채우려 자라나는 ’좋은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책 줄거리는 어쩌면 단순하다. 함께 놀고 함께 음악을 듣고 함께 모험을 나서고 함께 정원 돌보기를 즐겼던 에번과 멍멍이. 둘은 언제나 함께할 줄 알았지만 어느 날 멍멍이가 죽고, 멍멍이를 정원 한구석에 묻은 에번은 혼자가 된다. 친구가 없는 에번의 삶은 황폐하다. 슬픔에 잠긴 에번은 함께 가꾸던 아름다운 정원을 깡그리 망가뜨리고 거친 잡초만 자라게 내버려둔다. 하지만 그 거친 땅에 호박 덩굴 하나가 기어들어와 열매를 맺고 에번의 마음도 다시 치유되기 시작한다.
그림책에서 에번은 주황색 여우로 그려졌고, 멍멍이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 까만 작은 개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그냥 사람과 개로 그렸어도 되는데 왜 여우일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책을 본지 오래된 지금, 내 기억에는 여우와 개가 아니라, 할아버지와 개, 함께 늙어가는 두 노인, 사이좋은 부부로 바뀌어 가며 저장되었다. 그림 사이에 보이는 마음이 쉴 수 있는 빈 공간들과 에번의 마음 따라 변해가는 정원의 모습만 또렷이 남았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상실의 슬픔, 그 슬픔과 마주했을 때 일상을 엉망진창으로 내려놓고 화를 내도 괜찮다고 이 책은 말한다. 깊은 슬픔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분노도 필요하다. 무거운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분노는 소리치고 움직이며 무엇이든 붙잡고 싶은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깊은 슬픔이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위로한다.
좋은 곳, 정원은 자연이 머무는 곳이다. 아무 책임이나 판단 없이 그저 흘러가는 시간만이 주인일 수 있는 공간, 가장 어둡고 쓸쓸하다가도 계절 따라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곳, 호박 덩굴에 물을 주는 작은 용기만으로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는 곳! 이 좋은 곳이 이미 우리의 마음 안에 있다. 우리의 정원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 될 수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곳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