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중순에 USA Today에서 특별 기획한 여름 독서 목록이 있었다. 다양한 장르의 선정된 책 소개를 받고 자세히 살펴봤다. 선뜻 끌리는 책이 없었다. 낯익은 작가들도 아니어서 어떤 책을 선택할까 망설이다 목록이 실린 신문을 읽던 책 위에 올려놓으며 집안 여기저기에 그리고 차 안에 읽다 만 책들에 내 의식이 눌렸다.
올 여름 손주들과 들썩이며 생활하느라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틈틈이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예전에 좋아했던 작가의 신작소설을 읽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플롯이나 내용은 여전히 상큼한데 이번에는 이질감을 줘서 읽다 말았다. 내가 왜 그녀의 작품을 좋아했는지 곰곰 생각해봐도 분명하지 않아서 나이 탓과 내 취향이 바뀐 거라고 간주했다.
여러 책과 잡지를 뒤적이면서 뜨거운 날씨에 화끈한 무엇인가를 찾다가 미적지근한 상태로 머무나 싶었다. 그러나 읽은 책들 중에서 슬그머니 다가와 색다른 재미를 준 책들이 있었다. 호주작가 Bruce Nash 가 쓴 소설 ‘All the Words We Know’ 와 영국작가 Claire Lynch의 소설 ‘A Family Matter’,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들이다. 그리고 신경림 시인의 ‘시인을 찾아서’는 오래전 한국 여행 중 교보문고에 들렸을 적에 내 시선을 잡았던 책이다.
‘All the Words We Know’는 기억을 상실해가는 80대 로즈 할머니가 양로원에서 생활하며 주위 환경을 담담하게 더러는 날카롭게 지켜보며 끈질기게 범죄를 추적한 스토리다. 그녀의 자식들과 손녀들, 그리고 양로원 직원들이나 함께 같은 시공간에 멈춘 노인들이 등장하고 빠르게 잃어버리는 기억의 단편 사이로 과거 그녀 삶의 희로애락이 줄곧 현재와 섞인다. 자신을 위한 삶에 충실했던 할머니는 제한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유머 스럽게 풀고 다양한 언어를 섞어서 재치 있게 그녀의 심적 변화를 묘사한다. 그녀는 하나의 의미를 가진 단어를 번복하며 주물럭대서 긴박감을 줬고 언어들이 어울려 풀어가는 스토리는 흥미 있었다. 영어의 마스터가 되지 못한 나는 신선한 충동을 받았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남편과 나의 대화 방식을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함께 마주 보면서 딴 이야기를 한다. 오랫동안 엔지니어로 일했던 남편은 투명한 질서를 고집하고 감상적인 나는 직감에 따른다. 각자 한 말들은 허공에 흩어지니 자연히 긴 이야기는 못한다. 하지만 나는 남편의 표정에서 그의 마음을, 생각을 읽어내는 전문가이다. 그러니 로즈 할머니의 중구난방 튀던 의식과 무의식의 독백은 낯설지 않았다. 사고의 자유로움과 치매로 인한 변화를 그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마주하던 자세가 좋았다. 훗날 내가 더 늙고 독립적인 생활을 못하면 로즈 할머니처럼 깨어 있는 의식이고 싶다.
‘A Family Matter’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40년의 시간이 끼여 있다. 남자와 여자, 여자와 여자, 남편과 딸을 잃은 엄마, 엄마를 잃은 어린 딸, 헌신적으로 딸을 키운 아버지와 굳게 손 잡고 성장한 딸, 그리고 40년이 지난 후에 암으로 시한부 목숨을 사는 아버지가 열어준 과거의 문에 들어선 딸. 사람이 만든 규제와 환경에서 용납되지 않던 상황도 세월이 지나며 변한 환경에서 평범한 사건이 된다. 상처받은 가족 모두가 잃어버린 시간에 가슴이 아릿했다. 금지된 사랑이 인정된 사랑으로 변한 사회에서 재회한 어머니와 딸. 분명 피는 물보다 진했다.
‘시인을 찾아서’는 책장 한쪽에 묵묵하게 숨죽이고 있던 책이다. 신경림 시인은 정지용 시인부터 천상병 시인까지 22명의 작고한 시인들의 발자취를 찾아간 다양한 기록과 그들이 남긴 흔적을 소개했다. 내가 한국을 떠난 지 반세기가 되었지만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시인들은 낯익은 이름이고 더구나 그들의 명시들은 기억 저편에서 건너와 가슴에 안겨서 읽는 내내 곳곳에 세워진 시비를 찾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모국의 거친 격동기를 살았던 시인들의 삶을 알고, 다시 만난 그들의 작품은 새로운 맛과 감동을 줬다. 더불어 시는 언어의 의미를 찾아 읽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읽는 것임을 새삼 인식했다.
나의 여름 독서는 인간성과 문학성을 맛본 성과를 거뒀다. 이제 본격적인 독서의 계절 가을이 오면 읽으려고 흩어져 있는 읽다 만 책들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