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43)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 하지(6월 21~22일)쯤에 캔 감자를 하지감자라 한다. 낮이 길어서 햇볕을 많이 쬐어 맛과 영양이 좋은 감자이다. 하지가 지나면 장마가 시작되고 습한 기후에 감자가 썩기 쉬워서, 어릴 때, 시골에서는 하지 지나고부터 감자를 끼니처럼 먹곤 했다. 삶은 감자를 더 맛있게 먹으려고 나는 설탕에 찍어 먹었는데, “어떻게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냐? 소금에 찍어 먹어야지.” 하는 핀잔을 듣고, 설탕과 소금으로 치열한 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
하지가 지나면서 여름이 시작되고, 낮이 조금씩 짧아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지만, 아침 해는 하지보다 7~8월에 훨씬 일찍 뜨는 기분이다. 열대야로 잠을 설쳐서 인지 잠시 눈 감았다 뜨면 어느새 창으로 햇빛이 쏟아진다. 이렇게 내겐 달갑잖은 해를 간절히 기다리다 지쳐, 빨리 깨우러 나선 친구들이 있다.
미시간 주에서 나고 자란 스테드 부부의 그림책 에 나오는 노새, 젖소, 조랑말은 어스름한 새벽에 일어나 헛간 문간에 서서 해가 뜨기를 기다린다. 아직 둥근 달이 떠 있고 세상 모든 것이 고요한 것을 보면 이른 새벽이 분명한데, 세 친구는 해가 뜨지 않아 걱정이다. 아침이 오지 않으면 농부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아침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셋은 고민하다 올빼미를 찾아간다. 올빼미는 양 목장 너머 부서진 울타리를 넘고 드넓은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잠자는 거인을 지나 세상 끝으로 가서, 아직 자고 있는 해를 깨워야 한다며 수탉을 데려가라 한다. 세 친구는 한 번도 농장 마당을 벗어난 적이 없다며 걱정하다가 “우리는 용감해져야 해.”라며 함께 떠난다.
잠들어 있는 양과 거인과 태양이 무슨 꿈을 꾸고 있을지 이야기 나누며 마침내 세상 끝에 섰을 때, 수탉이 큰 소리로 운다. 세상은 밝은 주황빛으로 물들고 잠에서 깬 농부가 철망 울타리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노새, 젖소, 조랑말의 고삐를 잡고 헛간으로 향한다. 셋은 맛있게 아침을 먹는다.
어둑한 새벽부터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아침까지, 헛간에서 농장을 가로질러가는 짧은 여행을 즐기는 동물 친구들의 이야기가 참 평온하다. 해가 늦게 뜬 특별한 이유도 없고, 예상치 못한 진짜 거인이 나타나거나 새벽부터 일어나 세상 끝으로 간 동물들 때문에 시끌벅적한 소동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푸른 새벽빛은 차갑지 않고 섬세하고 따뜻하며, 농장의 풍경은 하품이 나올 만큼 고요하고 평화롭다.
일상이란, 날마다 반복되는 삶의 모습이다. 날마다 반복되지만, 삶의 주체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지금, 일상이 고통스럽다면 그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평안을 얻는 길일 것이고, 일상이라 여겼던 것이 무너져 고통을 받는다면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평안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잃어버린 일상으로 힘들었던 코로나19 시기를 기억한다. 파란색(blue)을 사회적 거리 두기에서 오는 고립, 불안, 우울로 매일 사용했던 때였다. 그때의 파란색과 다르게 책 속의 푸른빛이 이렇게 평화로운 것은 동물들의 모험이 울타리 안에서 끝남을 보았기 때문이다.
안전한 헛간을 나와 농장을 가로질러가도 ‘세상 끝’은 농장 가장자리에 있는 철망 울타리 안이다. 든든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보호망 안에서의 모험은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장난처럼 보인다. 세상의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만들어 주려 애쓰는 일상의 테두리는 이런 울타리가 아닐까? 고삐를 매지 않아도, 아이가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모험을 떠나도, 크게 상처받지 않고 되돌아올 수 있는 일상의 테두리, 이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불안과 우울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든 소금에 찍어 먹든 먹을 감자가 있어야 내일 해를 기다릴 수 있다. 사회의 울타리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가두기 위함이 아니라, 고삐를 풀어 두고도 편안히 잠잘 수 있는 보호망이며 해가 늦게 뜨더라도 아침밥을 먹을 수 있다는 약속이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