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18
열쇠를 꽂고 손잡이를 돌린다. 코끝을 스치는 다른 세상의 냄새에 메르세데스의 눈이 꿈을 꾼다. 황홀한 욕망과 일탈의 죄의식이 합쳐진 복잡한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 스친다. 신이 고개를 돌린 사이, 잠시 벌어진 틈 사이로 꿈에 그리던 세상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것은 선물일까 재앙의 시작일까? ‘자신의 삶에 지친 사람은 자신이 아니어도 되는 장소를 필요로 한다’ 고 말하는 영화속의 대사가 떠오른다.
영화는 1955년 칠레작가 마리아 카롤리나 겔(Maria Carolina Geel)이 애인을 살해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감독은 ‘메르세데스(Merceritas)’라는 성실하고 조용한 성격의 여자를 창조하고 마리아(Maria)의 캐릭터를 각색한 새로운 마리아를 만들어 낸다. 일치하는 접점이 하나도 없는 두여자의 만남. 영화는 그 만남을 시작으로 변해가는 메르세데스의 모습을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며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두 여자는 살인사건을 통해 만나게 된다. 마리아에게 살인은 결과였고 메르세데스에게 그것은 시작이었다. 처음 눈을 마주친 둘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클로즈업된 두 여자의 얼굴이 교차되면서 서로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긴장감이 맴돈다. 정반대의 극이 서로를 향해 끌려가 듯 서로에게서 결핍된 자신을 본 것이다.
메르세디스는 법원 판사의 비서이다. 비좁은 집에서 장성한 두 아들과 칸막이로 주방을 가리며 이벤트 사진을 찍어야 하는 남편과 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소박한 생활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화려한 불빛이 즐비한 호텔에서, 피로 얼룩진 마리아의 허탈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삶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증거품인 마리아의 가방에서 빨간 립스틱을 꺼내 자신의 입술에 바르는 장면은 억눌렸던 메르세데스의 욕망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다.
욕망이 현실로 들어 오기 시작한 것은 판사의 부탁으로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면서 부터이다. 문을 연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한번도 가지지 못했던 안락함에 사로잡힌다. 부드러운 소파와 가득 찬 책들, 화려한 화장대, 은은한 향기, 메르세데스는 마리아가 뿌렸을 향수와 붉은 립스틱을 쓰다듬으며 거울에 비친 마리아의 모습을 상상한다. 거울 속의 마리아는 어느새 메르세데스가 되고 또 다시 마리아로 바뀐다.
감독은 두 여자의 얼굴을 스위치 시키며 앞으로 일어날 메르세데스의 행동을 암시한다. 이제 증거품인 그녀의 집 열쇠는 메르세데스의 가방에 담긴다. 마리아의 향수를 쓰고 옷을 입고 출퇴근마저 마리아의 집에서 한다. 그녀는 마리아의 책을 꺼내 읽고 와인을 마시며 소란하고 복잡한 자신의 진짜 삶을 잊어가고 있었다.
반면 마리아는 수녀원에 수감되면서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 메르세데스가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마리아는 오히려 그 모두를 내려 놓음으로써 진정한 창조의 힘을 되찾게 된다. 그녀는 좁은 창문과 작은 책상에 앉아 새로운 소설을 쓴다. 그 소설은 세간의 화제가 된다.
유명세 때문일까, 많은 사람의 청원끝에 마리아는 사면된다. 마리아가 집으로 들어가는 날, 맞은편 카페에는 책을 손에 쥔 메르세데스가 있다. 둘의 시선이 또 다시 얽힌다. 그러나 짧은 순간 시선은 풀어지고 마리아는 자신의 집을 향해 발을 옮긴다. 그것을 보는 메르세데스의 입가에는 한세월을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아직도 무언가를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뚜렷한 결말을 내지 않는 감독의 시선에 악평을 하는 비평가도 있고 전반적으로 영화가 밋밋하다고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메르세디스의 꿈꾸는 듯한 눈빛이 잊혀지지 않고 계속 생각났다.
우리는 이따금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꾼다. 그것은 단지 욕망의 헛된 꿈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건너갈 수 없는 가능성에 대한 동경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영화는 말한다.
그 가능성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만난 것은 또 다른 자신일 뿐이라고. 메르세데스가 찾은 것은 마리아의 삶이 아니라 잊고 있었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욕망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이러니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향해 반짝이고 있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