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해가 질텐데… 나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둠이 저 붉은 노을을 데려가기 전에 집에 도착해 오롯이 그 빛을 바라보고 싶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서둘러 운전하는 동안에도 백미러에 번지는 노을 빛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길을 돌릴 때마다 밀물처럼 스며드는 붉은빛이 더욱 짙게 번져가고 있었다. 그 풍경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었다.
그때의 마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실 그 노을을 보기까지 며칠은 회색 하늘과 바람, 비로 가득했다. 땡스기빙을 맞아 동생 가족이 파나마의 해변으로 초대했던 여행이었다. 멋진 에어비엔비를 예약했고, 석양이 특히 아름다운 곳이라며 고모가 좋아할 거라는 조카의 말에 기대는 한껏 부풀었다. 아들 가족까지 함께 모인다는 사실과 어린 두 손녀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설렘도 마음을 환하게 물들였다.
삶이 매일 새로운 여행과도 같지만, 집을 나서 낯선 곳으로 향하는 일은 언제나 또 한 번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통유리로 된 이층집은 바다와 만나는 자리에 있었다. 민물가에서나 볼 법한 갈대들이 물가에 일렁였고, 해풍에 허리 굽은 소나무와 팜 트리가 수영장 주위를 둘러서서 출렁이는 물결과 함께 춤을 추었다. 큰 강을 품은 듯한 집 앞의 풍경은 한눈에 보아도 이곳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도착한 첫날부터 잿빛 하늘은 잔비를 품고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심술을 부렸다. 기온도 뚝 떨어져 바깥 활동은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흐린 하늘 아래의 풍경은 그 나름의 고요함으로 하루의 마무리를 이끌어 주듯,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돌아보게 했다. 가족이라는 존재의 의미 또한 다시 생각하게 했다.
마지막 날 오후, 기온이 오르고 하늘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만났다. 가족들과 함께 바라보며 느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풍요의 절기를 함께 맞는 날,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바라보는 석양은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기대를 내려놓았던 터라, 물들어가는 하늘은 더 큰 감동으로 와 닿았다. 조급함을 달래듯 서서히 번져가는 빛은 잔잔한 평화를 물결 위에 내려놓으며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집에 도착하자 이층 발코니에서 모두가 함께 타 들어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은 밀물처럼 다가와 뜨거운 기운으로 우리를 감싸 안았다. 열심히 살아온 하루의 끝에, 마지막까지 세상을 물들이며 밤의 고요속으로 사라져가는 그 순간, 아름다운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 빛을 닮은 사람들, 세상을 떠난 그리운 이들, 여전히 나의 곁에서 의지가 되어주는 사람들, 멀리 있지만 늘 힘과 빛이 되어주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오랜 시간 만들어온 익은 색들이 나를 물들이고, 또 서로를 물들이며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남은 빛이 물결 위에 흔들릴 때, 나를 아름답게 물들여 준 것은 결국 내 주변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더 좋은 빛으로 물들어 간다면, 나는 과연 어떤 빛으로 그들에게 비춰지고 있을까를 떠올렸다. 내가 비워지고 가벼워져야 세상도 깊은 감동으로 다가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관계에는 욕심과 이기심이, 질투가 가끔 화를 부르기도 한다.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다. 조금 더 나누고, 조금 더 양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늘 쉽지는 않다.
내겐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조카가 어느새 훌쩍 자라 직장을 잡고 우리를 초대한 이번 자리에서, 여러 생각이 스쳤다. 즐거움과 고마움 사이에서, 그동안 주위를 충분히 돌아보지 못한 채 지내온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짧았지만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순간이었다. 노을 속에서 나는 천천히 물들어갔다. 짙은 빛들이 한 겹, 또 한 겹 내려앉으며 오랜 감정들을 깨웠다. 그리고 내가 물들여야 할 남은 삶을 가만히 되짚어 보았다. 밀물처럼 다가온 빛이 내 마음을 채우듯, 나 또한 누군가의 가슴에 조용히 스며드는 빛이 되기를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