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가을, 토요일 아침에 공원을 혼자 걸었다. 포장되지 않은 숲속 길은 낙엽으로 덮였다. 걸음마다 낙엽이 밟히고 스치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렸다. 쌓인 낙엽들이 발길에 차여 흩어졌다. 늘 걷던 숲길도 계절이 바뀌니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우람하고 검푸른 큰 나무 기둥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진다. 숲속 깊이까지 낙엽으로 덮인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길가 큰 나무 아래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 작은 나무들이 노랗게 단풍 들어 햇빛에 반짝인다. 여름 내내 그늘에 가려 있던 잎사귀들이 가을 햇살을 만나 유난히 빛난다. 크리스마스펀의 초록 풀잎들이 누런 낙엽들 배경으로 돋보인다.
공원 숲도 곳곳이 다르다. 어떤 곳에는 소나무들이 무성하고, 어떤 곳에는 참나무들이 빽빽하다. 또 어떤 곳은 여러 나무들이 뒤섞여 있다. 같은 나무들이 모여 사는 모습을 보니 한국의 옛 김씨촌, 조씨촌, 장씨촌 같은 동성 집성촌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고향’이라며 찾아갔던, 우리 성씨 사람들이 모여 살던 시골 마을이 생각난다.
소나무 숲길을 걷자 발밑이 푹신하다. 떨어진 솔잎들이 길을 덮고 있다. 소나무도 가을이면 누런 솔잎을 떨군다. 자세히 보니 올해 자란 끝가지와 작년에 자란 가지에는 여전히 초록 솔잎이 붙어 있고, 안쪽 가지의 오래된 솔잎들만 누렇게 변해 땅으로 떨어졌다.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에는 죽어 쓰러진 나무들이 유난히 많다. 십 년에서 삼십 년쯤 자란 나무들이다. 죽어 검게 변한 줄기가 땅에 누워 있기도 하고, 옆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 있기도 하며, 꼿꼿이 선 채 죽어 있는 것도 있다. 장대처럼 키만 큰 가느다란 나무들이다. 솔씨가 떨어져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자라던 소나무들이 자라며 덩치를 키우는 동안,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한 나무는 결국 도태된다. 무나 배추를 솎아 주어야 제대로 자라듯, 소나무들도 자라며 자연스러운 솎음질을 겪는다.
숲속에서 초록 이끼 봉우리가 낙엽 사이로 유난히 봉긋하다. 가까이 가 보니 그것은 늙어 쓰러져 죽은 큰 나무의 등걸을 덮고 있다. 남아 있던 굵은 줄기는 흔적만 남긴 채 거의 다 썩어 낙엽 속에 묻혀 사라진 듯하다. 숲에서 쓰러진 죽은 나무들은 오래 살다 죽었든, 십 년도 채 살지 못하고 죽었든, 저마다의 시간 속에서 썩어 결국 눈에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숲길 가까이에 죽어 쓰러진 큰 나무 토막이 있다. 그 속에는 큼직한 구멍이 나 있다. 동물들이 그 안에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무 토막에는 수많은 작은 구멍들이 보인다. 하늘소, 딱정벌레, 나무좀, 개미, 말벌 같은 곤충들이 집을 짓고 알을 낳으며, 유충들이 썩어 가는 나무를 먹이 삼기 위해 뚫은 흔적이다. 단단한 나무에 저렇게 둥근 구멍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 이끼와 버섯들도 죽은 나무에서 먹이를 얻어 살아간다. 그렇게 썩어 흐트러진 나무 부스러기들은 이웃의 살아 있는 나무들의 거름이 되어, 나무들이 더 잘 자라도록 돕는다.
“죽어 쓰러진 나무야, 너는 죽어서 슬프니?” 바보 같은 질문을 던져 본다.
“씨에서 싹이 트고, 자라고, 씨를 남기고 죽는 일을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해 왔어. 앞으로도 계속될 거야. 죽은 나무는 곤충과 이끼의 먹이가 되고,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지만, 나무를 이루던 원소들—탄소와 수소와 산소와 질소, 그리고 여러 미네랄—은 사라지지 않아. 사라지지 않는 원소들은 다시 결합해 다른 생물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 죽음을 반복하지. 너 역시 같은 과정을 거친다는 걸 알고 있지? 너의 몸도 같은 원소들로 만들어졌고, 네가 죽어도 그 원소들은 순환한다는 것도. 죽어 쓰러진 우리가 슬퍼 보인다면 그건 너의 감정일 뿐이야.”
어리석은 질문에 이런 생각들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온다.
숲속 길을 혼자 걷는다. 울창한 나무들 속에서 숲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찬란한 아침 햇살이 굵은 나무 줄기 사이로 반짝인다. 낙엽 밟는 소리가 사각사각 울린다. 숲속 깊이까지 훤히 보이는 바닥에는 쓰러진 검은 나무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낙엽이 이불처럼 숲속을 덮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