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우리 졸리가 안 먹어요. 성당 길냥이 가져다주세요” 올케 손에는 졸리가 외면한 고급 고양이 간식이 들려 있었다. 까다로운 졸리의 입맛 덕분에 우리 성당 길냥이들이 가끔 호사를 누린다. 내가 사다 놓은 간식은 늘 같은 종류의 통조림이지만, 졸리가 입도 대지 않은 화려한 먹이를 가져가는 날이면 녀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궁금해진다.
사제관 주변의 길고양이들이 마음에 걸렸던 신부님이 밥을 주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4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인기척만 나도 재빨리 몸을 숨기던 녀석들이 이제는 미사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오기도 한다. 먹을 것을 기다리는 속셈인 걸 알면서도, 꼬리를 세우고 앞에서 오락가락하는 녀석을 보면 반가움이 앞선다. 오히려 보이지 않으면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서운하고 걱정이 될 정도다.
어느 날, 사제관 입구에 빈 박스로 만든 장난감 집이 놓여 있었다. 길냥이가 새끼를 밴 것 같아 마음이 쓰였던 신부님의 선물이었다. 그 따뜻한 마음을 고양이도 알았는지 녀석은 그 집에 떡하니 들어앉아 가끔은 재롱도 피웠다. 얼마 뒤, 오글거릴 만큼 작은 녀석들이 올망졸망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연신 새끼들을 핥으며 젖을 몰리는 어미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뒤뚱거리며 걷던 아이들이 이내 깡충거리며 뛰노는 모습을 보는 일은 성당 가는 또 다른 설렘이 되었다. 여러 번의 출산을 거치며 새끼들은 떠났지만, 첫 배에서 난 한 마리만은 여전히 어미 곁을 지키며 성당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새끼들이 독립하기까지 보여준 어미 고양이의 모성은 뭉클하면서도 대견했다.
가끔 올케집에 가면 졸리를 불러보지만, 새침하고 도도하기 짝이 없는 녀석은 우아하게 캣타워에 앉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유모차를 타고 산책을 즐기는 ‘귀부인’ 졸리의 간식 상자는 화려하기 그지없고 장난감도 넘쳐난다. 반면, 성당의 길냥이는 통조림을 따주기가 무섭게 코를 박고 허겁지겁 먹느라 머리에 양념이 묻는 줄도 모른다.
“야! 좀 천천히 먹어!” 타박을 하면서도 흙바닥을 구르며 풀잎을 묻히고 사는 이 녀석이 나는 더 사랑스럽다. 비록 사람 손길을 쉽게 허락하지는 않지만, 슬쩍 몸을 비비며 건네는 녀석만의 감사 인사를 알기 때문이다. 가끔 다른 고양이에게 물렸는지 상처가 보일 때면 마음이 더 쓰인다.
이번에 올케가 준 간식은 꼭지만 따서 손으로 잡고 먹이는 것이었다. 과연 길냥이가 얌전하게 잘 받아먹을지 궁금했다. 그날따라 특식을 줄 생각에 마음이 앞섰는데, 도로에서 사고가 났는지 차가 꽉 막혔다. 겨우 미사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배고프다고 성당 입구까지 따라오는 녀석이 보였다. 미안한 마음에 “미사 마치고 보자!”말하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가 끝나자마자 녀석에게 달려갔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보채는 녀석에게 간식을 조금 짜서 내밀자, 갑자기 훅! 하고 달려들어 덜컥 겁이 났다. 길들여진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받아먹을 줄 모르는 야생의 아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결국 밥그릇에 통조림과 간식을 함께 섞어 주었다. 녀석은 기다리지 못하고 입부터 들이밀었고, 그 통에 녀석의 머리와 내 손은 끈적한 양념범벅이 되었다. 나는 아이에게 훈계하듯 중얼거렸다. “야! 좀 천천히 먹어, 이게 뭐니!”
투덜거리면서도 한편으론 ‘왜 이렇게 사랑스럽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고양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동물을 키워왔지만, 곁을 잘 내어주지 않는다는 선입견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하지만 밥을 챙겨주고 조용히 사랑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우아하게 길들여진 삶보다 배고프면 달려와 허겁지겁 먹고, “야옹아!” 부르면 어디선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본능적인 모습이 이제는 참 좋다.
때로는 배가 불러 있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고,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놓은 걸 보면 위대해 보인다. 며칠씩 굶어 배가 등에 붙은 채로도 새끼들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흙바닥에 뒹구는 거친 삶 속에서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제 자식을 애틋하게 품어내는 그 모성 앞에서, 나는 가만히 읊조려 본다.
“너도 엄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