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짜리 운전면허증을 새로 받았다. 내 나이 꽉 찬 81세, 아마 이것이 내 생애 마지막 운전면허증일 것이다. 새 면허증을 손에 쥐던 순간 미국으로 이민 와 처음 운전면허증을 받던 기억이 떠올랐다.
1988년 8월, 우리는 시카고에 터를 잡았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일자리를 구하고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 공부를 했다.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빴던 그 시절에는 문화 충격이니 인종 차별이니 하는 것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12월이었다.
악명 높은 시카고의 겨울, 매서운 바람이 불고 함박눈이 쉼 없이 쌓였다. 찻길마다 제설차가 부지런히 소금을 뿌리고 눈을 치웠지만 하늘은 양동이로 퍼붓듯 눈을 쏟아냈다. 폭설에 속수무책이었다. 차들은 소복소복 쌓이는 눈을 이고 엉금엉금 기어갔고 여기저기에서 미끄러져 충돌 사고도 흔했다.
밤에 우체국에서 일하던 나는 새벽에 퇴근하면 24시간 문을 여는 그로서리에 들러 장을 봐야 했다. 그로서리의 주차장에는 발이 푹푹 빠질 만큼 눈이 쌓였고 온 천지가 하얀 눈뿐이었다. 어디선가 백석의 ‘하얀 당나귀’ 울음소리라도 들려올 듯 환상적인 설경이었다. 그 풍경을 감상할 여유도 없이 나는 서둘러 장을 보고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고 학교에 보내야 했다. 차선도 보이지 않는 입구에 주차를 하고 얼른 식료품 몇 가지를 사서 나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 차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새벽빛 속에서 배우 ‘로버트 레드퍼드’를 닮은 미남 경찰관이 운전면허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가방을 뒤져 면허증을 내밀었다. 미남 경찰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 한 번 쳐다보고 면허증 한 번 쳐다보더니 “이것은 유효 기간이 지난 면허증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민 올 때 한국 운전면허증을 국제운전면허증으로 바꾸어 왔는데 나는 막연히 1년 정도는 유효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1년이 아니고 한 달이라니. 무면허 운전에다 장애인 주차 구역에 차를 세운 중범죄자가 되어 버렸다. 당황한 나는 서툰 영어로 “몰랐다. 안 보였다” 하고 더듬거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이 터지자 그동안 쌓였던 서러움까지 와르르 밀려들었다.
나보다 더 당황한 미남 경찰관은 황급히 티켓 대신 경고장만 써 주었다. 그리고 집까지 에스코트해 주며 “빨리 미국 운전면허를 받아야 한다. 그때까지는 절대 운전하면 안 된다”며 손가락을 세워 주의를 주고 돌아갔다.
그 주에 운전면허증을 받았다. 1988년 12월이니 어느덧 38년이 흘렀다. 길치에 방향치인 내가 38년 동안 큰 사고 없이 운전하며 돌기도 했지만 결국 집을 찾아 들어가서 여기까지 왔다니 참 신기하고도 감사하다.
어두운 밤길을 마음 졸이며 어렵게 달려왔던 세월이 지나고 이제는 어스름한 새벽이 밝아오는 지금, 내 곁에서 따뜻한 선의로 나를 보듬어 준 사람들, 그리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지켜 주신 하느님의 손길이 있었다. 고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