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서로마제국 멸망 후 동로마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황제다. 그는 분열된 동서교회를 통합시키고 이탈리아 본토 회복과 지중해 세계의 통일로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다. 이 황제 뒤에는 현명하고 강단 있는 한 내조자가 있었다. 바로 테오도라 황후였다. 이탈리아 라벤나의 성 비탈레 성당 제단을 둘러싼 세 벽면은 비잔틴 시대의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다. 중앙 벽에는 천구 위에 앉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그 양편에 각각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그의 부인인 황후 테오도라가 있다. 이 셋은 모두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었다. 자색은 예수와 신의 대리인으로 여겨졌던 황제에게만 허락된 색이었다. 시종들을 거느린 테오도라가 입고 있는 자색 망토는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권력을 갖고 있었는가를 증명한다.
원래 그녀는 검투사들이 피를 튀기며 싸우는 경기장에서 춤을 추며 연기하는 배우였다. 그녀가 창녀였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그녀는 비천한 출신이었다. 16살 때 그녀는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세상 경험을 좀 더 쌓은 뒤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돌아와 궁전 근처에서 양모를 짜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때 운명의 사나이 유스티니아누스를 만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녀의 미모와 재능과 삶에 대한 열정에 홀딱 반했다.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면 여배우 출신도 로마 귀족과 결혼할 수 있다는 특별법까지 만들었다. 그녀는 527년 남편과 함께 공동대관한 뒤 아우구스타(女帝)의 칭호를 받아 제국 통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총명한데다가 뛰어난 정치감각을 갖고 있었던 테오도라는 제국의 거의 모든 법령을 만드는데 관여했고, 남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녀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위 초창기에 일어난 ‘니카 반란사건’이었다. 옛 로마제국에서부터 로마의 전차경기장은 국가가 공인한 시민들의 휴식처였고, 동로마에서는 ‘히포드롬’이라고 불렀다. 히포드롬은 모든 재미를 충족시켜 주는 곳이었다. 전차경기를 주로 했지만, 검투사들의 생사를 건 싸움에 돈을 걸기도 했고, 맹수들의 싸움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전차경기나 검투사 싸움이 계속되면서 경기를 보는 사람들도 편이 갈렸다. 로마 시민들은 전차경주의 기수가 입는 옷 색깔에 따라 백색파, 적색파, 청색파, 녹색파 등 4개의 팬덤으로 갈렸다. 이 중 청색파와 녹색파는 계급도 다르고 진보, 보수적인 성향도 달라서 축구장의 훌리건처럼 툭하면 난동을 부리는 골치 아픈 집단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즉위 이전 정치적 종교적 정책을 지지하는 청색파를 비호하고 반대파인 녹색파와 대립했는데, 제위에 오르자 정치적 압력단체가 되기 쉬운 당파들을 탄압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청·녹 양파가 532년 1월 ‘니카’를 외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니카’란 ‘이겨라!’라는 뜻으로 경기장에서 외치는 일종의 구호 같은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는 처음에 청색파와 손을 잡고 진보적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그의 개혁이 너무 과격했고, 황후마저 비천하다 보니 청색파와 녹색파 모두 황제의 개혁을 의심하고 반대했다. 그 결과 이 두 파 모두 ‘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을 이용해 반황제파 원로원은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의 조카 히파티우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폭도들은 새로운 황제를 앞세우고 궁문을 부수고 왕궁으로 거세게 밀려들어왔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대책을 결정하기 위해 열린 궁정회의에서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테오도라가 결연히 나섰다.
“황제가 된 사람이 도망가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수치입니다. 저는 도저히 이 자줏빛 어의를 벗어 던지지 못하겠습니다. 또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황후로 받들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황제시여, 지금 살아남기 바라신다면, 우리는 돈도 많고, 바다가 있고, 배도 있으니 도망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어의(御衣)가 곧 훌륭한 수의(壽衣)라는 옛말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황제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에게 결사대를 이끌고 나가 폭도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폭동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약 3만 명이 학살되었다. 결국 테오도라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제국을 수호했다. 이처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곁에는 38년간의 통치를 도운 현명하고 당찬 황후가 있었다. 그녀는 황제가 로마제국의 옛 영토를 되찾는 정복사업을 벌여 동로마의 영토를 확장하고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도록 보좌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녀를 공동황제로 대우했다. 이 놀라운 여인은 남녀평등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고, 특히 여성의 인권 신장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성매매업소를 폐쇄하고 성노동여성들의 쉼터를 마련했으며 강간을 사형으로 처벌했다. 이혼법을 개정해 이혼 및 재산 소유권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확대했다. 이런 여러 업적 때문에 동방정교회에서는 그녀를 성녀로 추앙하고 있다.
지혜롭고 영특한 여인은 아름답다. 인도 시인 타고르는 신비로운 여성 매력에 감탄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여인이여, 반은 여성이고 반은 꿈이로다.” 역사적으로 남자는 세계를 움직였으나 여자는 남자를 장악했다. 그래서 “남자는 눈을 가졌지만 여자는 통찰력을 지녔다”고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가 지적했다. 지혜로운 아내는 가정을 지키고, 남편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귀한 존재다. 지혜 있는 아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잠언 1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