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이 옷을 갈아입고 있다. 한달전만 해도 푸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나뭇잎들이 서서히 노랗게, 붉게 변하고 있는 중이다. 뒷마당에 홀로 선 감나무 잎은 아직 그대로 초록인데 열매는 발갛게 물들어 자꾸 눈길을 끈다. 바람이 서늘해 지니 하루가 다르게 발갛게 익어가는 감을 나보다 먼저 알아채는 녀석들이 있다. 달콤한 맛이 들기 무섭게 새들이 와서 쪼아 먹는 것이다.
예쁘고 고운 색의 말랑한 열매는 벌써 새들이 입맛을 들여 놓았기에 나의 순서는 언제나 그들 보다 뒷전이다. 이제 감을 따야 한다. 새들이 다 먹기전에 말이다. 그래도 추석 한가위가 지나고 시원한 바람이 불 때 선물처럼 거두어 들일 수 있는 달콤하고 말랑한 감을 따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우리집 감은 한차례 단단한 단감을 실컷 나눠 먹고 나서야 맛을 볼 수 있는 빨갛고 말랑한 홍시이다.
13년전 감나무를 사다 뒷마당에 심었는데 그해부터 지금까지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기특하게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잎을 만들고 시간이 되면 맛있는 열매를 맺어준다. 홍시는 단감과는 다르게 노랫말에도 나오고 어느 시인의 마음에도 열려 아름다운 시가 되니 저마다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에겐 외할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것 중에 하나도 홍시이다.
할머니는 과일중에 홍시를 제일 좋아하셨다. 한겨울에도 보관해 두었던 홍시 하나 꺼내 맛있게 드시던 모습이 그립게 떠오른다. 제법 커다란 감나무 아래에서 나는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곳에 열려 있는 것들만 하나씩 따 담았다. 모양 좋고 색깔도 좋은 녀석들은 거의다 손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어 그저 바라만 보게 한다. 작은 사다리 놓고 조금 더 높이 올라갔다. 혼자 따려니 한 손에 가위 들고 다른 한 손에 두어 개 잡으면 다행이라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손을 뻗어야 했다. 그래도 보기 좋은 것들 새들이 먹기전에 따 놓아야 하기에 부지런히 움직여 한 바구니 가득 담았다.
물수건으로 하나하나 먼지를 털듯 닦아주면 반질반질하게 자신의 색을 더욱 곱게 드러낸다. 내일 친구들에게 골고루 나눠 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앞서 즐겁다. 감이 익어가는 가을은 자연이 옷을 바꿔 입는 듯 푸르던 세상에서 빨강, 노랑, 주황, 검붉은 잎사귀들로 저 멀리 산 위에서부터 내려와 가슴 설레는 색들로 거리를 채워준다.
나는 특히 가을색을 너무 좋아한다. 오래전 보았던 내장산 빨간 단풍과 신륵사 입구에 펼쳐진 노란 은행잎들, 설악산을 뒤덮은 울긋불긋한 색들의 향연은 눈감아도 선명히 보이는 가을의 선물이고 언제든 다시 보고 싶은 풍경이다. 낙엽이 되어 떨어진 나뭇잎들 마저도 발길을 붙잡는다. 발 아래 소복이 쌓여 있는 나뭇잎을 지나며 듣는 소리는 놓치기 싫은 가을의 낭만이다.
한 지인은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슬프다고 했다. 혼자 덩그라니 남은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눈물이 나서 쓸쓸하다 말한다. 정말 가을의 나뭇잎들은 쓸쓸히 죽어가는 것일까? 스스로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색들로 그 어느때 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가을을 말할 때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간다는 표현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초록의 싱싱함이 제대로 익으면 붉은 빛을 내고 떫던 감도 제대로 익으면 단 맛을 낸다. 우리들 삶도 그러하겠지! 푸르던 젊은 날 이리저리 헤메이며 꿈을 쫓아 뛰던 청춘이 세월에 맞서 살아내다 보니 지금 이 자리이다. 오늘의 내가 더이상 무언가를 쫓아 급급하지 않아 좋고 누군가의 삶에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마음이 있어 감사한 것을 보면 그런대로 잘 익어가는 중이리라 믿는다.
가을날 잘 익은 홍시를 따며 삶을 들여다보는 오십이 훌쩍 넘은 내가 나는 좋다. 홍시 나눠 먹으며 나누는 우리들의 이야기에는 웃음도 눈물도 녹아 있을 것이다. 아주 잘 익은 홍시 맛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