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주 북부의 단풍은 이제 절정기다.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잎들이 성급하다면 아직 푸르고 단단하게 가지를 잡고 있는 싱싱한 잎들은 은근과 끈기를 자랑한다. 아침 햇살에 파르르 떨며 흩날리는 낙엽을 감탄하며 가을의 향기가 가미된 커피를 마시니 ‘life is good’이다.
새벽에 큰사위가 집 떠나기 전에 내려놓고 간 커피는 내 입맛에 꼭 맞다. 강한 커피를 즐기는 그가 만든 커피를 뜨거운 물로 희석해서 마신다 했더니 오늘은 우리 부부가 좋아할 강도로 만들어 놓고 출근했다. 그리고 지난번 뉴욕에 출장 갔다 돌아온 작은 사위도 가방에 넣을 수 없어서 박스를 손에 들고 다녔다던 뉴욕의 명물로 아침을 준비해줬다. 맛보다 마음이 고마웠다. 평소에 소소한 일에도 나이든 장인 장모를 배려하는 사위들에 고맙고 두 사돈네가 반듯하게 잘 키워준 아들들이 우리 생활 깊숙이 든든한 가족으로 자리잡은 것에 늘 감사한다.
예전에 한국 근무 중에 어린 딸들을 데리고 경산에 있는 친척집에 들렸을 적이다. 어른들은 아들이 없는 나를 가여이 여기시고 꼭 아들을 하나 낳아야 한다고 임신을 부추기셨다. 군복을 입고 발령지 따라 이동해야 하던 그 당시의 나의 상황은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른들의 “아들, 아들…” 타령은 나에게 작은 스트레스를 줬었다. 그때 아들 없다는 것이 마치 내 삶의 결점처럼 느껴 지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딸들이 성장해 어른이 되는 것을 지켜보며 만족했다. 그리고 얼마전 지인이 아들의 집을 “며느리의 집” 이라 말했을 적에 내 속에서 낯선 기류가 흘렀다. 그녀는 무의식 중에 말했지만 그 속에 아들 가진 엄마의 미묘한 상황을 느끼니 아들 없는 내 처지가 다행인가? 싶었다.
더구나 2년 전, 몽고메리 글동무들의 모임에서 20분에 쓰는 글제목으로 ‘아들’이 선택된 날, 나는 당황했었다. “아들 없는 사람은 우짜라고” 했지만 시 한 편을 썼다.
‘아들/ 낯설다/ 입안에 굴려도 여전히 낯설다/ 손가락 다섯/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데/ 남자의 등은/ 여자의 품보다 넓어 보인다/ 남녀평등 추구하면서/ 아들 딸 구별하면서/ 하늘과 땅을 나눈다/ Culture인 남자보다/ Nature인 여자를 선호하는 것은/ 아들을 갖지 않은/ 여자의 자존심/ 아들/ 누구 아들?’
조지아 마리에타에 있는 작은딸네 뜰에 거대한 나무가 두 그루 있다. 그 나무들이 떨쳐내는 손바닥 크기의 낙엽들이 앞뒤 뜰을 덮기 시작했다. 딸이 일하며 아이들 키우는데 많은 낙엽을 감당할 수가 없어 작년에 남의 손을 빌렸더니 1천불이 들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그곳에 머문 동안 매일 뜰에 나가 낙엽을 긁어 모았다. 그리고 딸집을 떠나면서 여기저기에 낙엽 무더기를 두고 가는 것을 미안해 했다.
그런데 버지니아주 북부에 있는 큰딸네에 왔더니 아뿔싸 이곳의 뜰은 더 야단이다. 집으로 들어서는 진입로조차 낙엽으로 덮여서 혼란했다. 그러나 며칠 행복한 기분으로 울긋불긋 단풍을 즐기다 정원수들까지 덮은 낙엽을 보니 마음이 어수선했다. 직장일로 바쁜 딸과 사위는 주말이어야 뜰관리를 하니 앞 뒤뜰의 낙엽은 우리 부부의 눈에 꽉 찬다. 흩어진 낙엽들이 부른다며 남편은 다시 매일 밖으로 나선다.
특히 숲 속의 별장인 이집에는 자연의 야생미가 있다. 넓은 뜰에 수령이 많은 나무들이 이룬 숲 아래 무질서로 엉킨 풀도 정겹고 푸근함을 준다. 남편은 낙엽을 긁어 모으고 정원수를 다듬으며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도시의 소음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세상사 나 몰라라 하고 낙엽과 티격태격하는 남편 옆에서 나는 단풍들이 그린 하늘 그림을 즐기며 강하고 아름다운 색색의 낙엽을 찾는다. 얼룩진 낙엽들은 마치 우리 부부의 노후를 닮았다. 풍성하지만 가볍다.
낙엽을 책갈피에 끼워 간직하던 버릇은 버리고 오늘은 문 옆에 자리잡은 돌 조각상 앞에 쌓아 올렸다. 언젠가 한국에 출장 갔던 딸이 가져온 귀여운 아기 부처상이다. 자리를 옮기려고 들었다가 무거워서 그대로 둔 것이 집안을 드나들 적마다 모국을 상기시킨다. 조용히 가을과 마주선 부처상의 미소에서 가슴에 품고 사는 내 자신의 근원을 본다. 삶에 변화를 주는 겨울이 천천히 왔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