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 때에는 꼭 동네를 산책하는 것이 오랜 습관이다. 오늘도 동네를 한 바퀴 돌다가 우연히 워커에 의지해 걷고 있는 바람개비 할머니를 또 만났다. 할머니의 느릿한 걸음에 비해 워커에 달린 바람개비는 씽씽 돌아가는 것이 재미있어서 내가 붙여드린 별명이다.
“어머니, 바람개비는 오늘도 쌩쌩 참 신나게 도네요.”
할머니는 연한 미소를 지었다.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다보니 할머니와 나는 어느새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워커에 늘 달고 다니는 바람개비는 버지니아를 떠날 때 교회 어린이들이 만들어 선물로 준 것이라는 것도 알 정도로 말이다. 할머니는 남편과 사별하고 미국에 이민 간 사촌과 연락이 닿아 버지니아로 갔다. 그 곳에서 재혼을 했지만 허약한 남편은 병 수발만 시키다가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버지니아에서 자매처럼 지내던 친구를 따라서 애틀랜타로 왔다. 덕분에 따뜻한 곳에 자리 잡고 잘 지냈는데 얼마전 친구가 먼 길을 떠났다. 이번에 친구가 떠난 곳은 할머니가 아직은 따라 갈 수 없는 먼 곳이었다. 할머니는 정부에서 나오는 돈으로 룸메이트를 하면서 근근이 살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가 며칠 째 보이지 않았다. 궁금하던 차에 워커에 의지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오랫 만에 나오셨네요. 잘 지내셨어요?” 할머니는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본인의 장례식에 사용하려고 모아 놓은 쌈지돈이 갑자기 없어진 것이다. 정부에서 돈이 들어오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부탁해서 현금으로 찾아서 모아놓은 것이다.
“그냥 은행에 두지 그걸 왜 찾으셨어요?” “내가 죽고나면 죽은 사람 돈을 은행에서 어떻게 찾아. 그래서 미리 모아서 목사님에게 드리려고 했지. 내 뒤를 부탁하려고… ”
할머니는 누가 할머니돈을 훔쳐갔는지 짐작이 가지만 공연히 소란을 피웠다가 이 집에서도 나가라고 할까봐 속만 끓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할머니를 위로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정부에서 도와주기도 하니까 너무 염려마세요. 그리고 은행에 가서 다른 사람이 대신 돈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알아볼게요.” 할머니는 겨우 눈물을 그치고 연신 내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사실 내가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해드린 것도 없는데 말이다. 가족이 없는 할머니는 이제 생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싶은 것이다. “죽은 몸뚱이 부탁하는 것도 미안한데 돈까지 쓰게 할 수 는 없지. 그래서 그렇게 돈을 모은거야.” 할머니의 울먹임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할머니가 잃어버린 건 돈이 아니라, 어쩌면 어쩌면 세상에 대한 마지막 기대였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다시 워커를 밀며 천천히 동네 길을 걷는 할머니가 보였다. 작은 걸음마다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힘이 숨어 있는 듯했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워커에 매달린 바람개비가 하얗게 돌았다. 오래된 워커에 달려 있는데도 바람개비는 여전히 가볍고 힘차게 돌았다. 그 모습이 마치, 누구에게나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작은 희망 같았다.
내일은 은행에 가서 알아봐야겠다. 할머니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무슨 좋은 방법이 꼭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