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45)
앨라배마 주에서 가장 높은 산은 체아하(Cheaha) 산이다. 몽고메리에서 차로 3시간 가까이 달려야 만날 수 있는 산으로 해발 약 735미터이다. 다른 주에 있는 높고 웅장한 산들에 비하면 동산처럼 나지막한 산이지만, 산이 귀한 미국 동남부에서는 그나마 등산다운 등산을 할 수 있는 산이다. 이 산 볼드락(Bald Rock)에 앉아 아래를 바라보면 여태껏 보지 못했던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산에 오르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자연 속에서 마음의 안식과 활력을 얻기 위해서, 오를 때는 힘들지만 정상에서 느끼는 성취감과 희열이 좋아서, 걸으면서 삶의 가치와 방향을 발견하기도 하니까… 이런 이유와 목적들이 산에 오르는 횟수가 거듭되면 점점 ‘산이 거기 있어서 오른다.’는 대답으로 바뀌기도 한다. 생각할수록 등산과 인생은 많이 닮았다.
캐나다 몬트리올 퀘벡 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고, 그림책을 만들고 있는 작가 마리안느 뒤비크의 는 산에 오르는 길이 곧 삶의 여정임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일요일마다 오솔길을 따라 산을 오르는 블레로 할머니는 나이가 아주 많다. 할머니는 산길을 걸으며 버섯을 따고,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돕고, 소중한 것들을 찾아낸다. 어느 날, 블레로 할머니는 산으로 가는 길에 어린 고양이 룰루를 만난다. 자신은 너무 작아서 산을 오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던 룰루는 잠시 망설이지만, 할머니를 따라 산꼭대기에 뭐가 있는지 보러 간다. 경험이 많은 할머니는 룰루에게 새들의 말을 듣는 법과 남을 돕는 법, 길을 선택하는 법, 쉬어가는 법 등 할머니가 알고 있는 산의 비밀을 모두 알려 준다.
할머니와 룰루가 함께 산에 오르는 시간이 늘수록 할머니는 힘을 잃어가고, 더 이상 할머니는 힘이 없어서 산에 오를 수 없게 된다. 이제 룰루 혼자 산에 오르기 시작한다. 룰루는 산을 더 잘 알게 되고 산이 간직한 비밀들도 스스로 발견한다. 그렇게 서서히 할머니의 산은 룰루의 산이 되어 간다. “할머니, 산꼭대기에는 뭐가 있어요?” “세상!” “세상의 꼭대기에 서 있는 기분은 최고일 것 같아요.” “스스로가 참 작게 느껴진단다.”
할머니는 자신의 경험을 참 지혜롭게 가르친다. 할머니를 처음 만난 룰루가 멀리 숨어서 할머니를 보고 있을 때, “둘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란다. 만일 네가 배가 고프다면 말이지.”라며 아무 부담을 주지 않고 초대한다. 그리고 룰루가 산을 즐기며 많은 경험을 하도록 천천히 속도를 맞추며 기다려준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의 걸음이 느려졌을 때, 룰루는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를 보살피고, 자신의 경험을 어린 토끼에게 나눠준다.
작은 손바닥 위에서 세상의 지식을 다 맛볼 수 있는 이 시대에, 노인의 경험이 다음 세대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마음의 소통이나 공감, 기다림, 따뜻한 위로와 격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어른이 아이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부터 바꿔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어 본다. 길을 선택해야 할 때,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선택의 순간에는 네 마음에 귀를 기울이면 된단다.” 라고.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하는 아이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 같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가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나침반을 잘 볼 수 있도록 등불을 들어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
이 책의 작가가 자란 캐나다 퀘벡은 단풍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퀘벡의 주언어는 프랑스어라, 이 책은 프랑스어가 원서다. 프랑스어를 몰라 원서는 읽지 못하고 영어와 한국어로 된 책만 읽었더니, 할머니 이름, 산 이름 등 서로 다른 게 좀 있다. 영어보다 한국어 번역이 작가의 부드럽고 서정적인 그림과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소슬바람 부는 가을날, 퀘벡은 못 가지만 요렇게 따스한 그림책 한 권 곰곰이 읽는 것이 나에겐 산으로 오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