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이민자라면 미국내 위안부 소녀상을 둘러싼 일본의 방해를 똑똑히 기억한다. 한인들은 미국 애틀랜타와 곳곳에서 위안부 소녀상을 세우며 역사를 기록하려 했지만, 일본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역사를 거부하고 지우려 하고 있다. 역사가 아무리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불행한 역사도 역사의 교훈”이라는 취지다.
그런데 이런 일이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기 시작한다. 미국의 역사는 위대한 이민의 역사지만, ‘노예제와 인종차별’이라는 불행한 역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국의 박물관이나 국립공원 곳곳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흑인 노예와 인종차별의 역사가 적혀 있다. 애틀랜타 시내에서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 역사 박물관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미국의 ‘불행한 역사’가 지워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후인 지난해 3월부터 국립공원관리청(NPS)는 전국 국립공원과 박물관에서 노예제 관련 전시물을 철거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 ‘미국 역사에 대한 진실과 건전성 회복’(Restoring Truth and Sanity to American History) 을 통해 “미국 역사나 인물의 부정적 측면을 과도하게 강조한 전시가 전체 역사적 맥락과 국가적 진보를 왜곡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조지아주 서배너의 ‘포트 풀라스키 국립 사적지’와 버지니아주의 ‘국립역사공원’에서는 남북전쟁 당시 촬영된 노예 학대 사진(The Scourged Back)이 철거됐다. 이 사진은 북부 지역에서 노예제 폐지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 사료로 평가돼 왔다. 또한 웨스트버지니아주 하퍼스 페리 국립역사공원의 노예제 표지판이 사라지고, 남북전쟁 당시 노예 학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진이 철거됐다. 이와 함께 공립학교 교육 현장에서도 ‘분열적 개념(divisive concepts)’을 이유로 인종차별, 노예제, 이민사 관련 교육 내용을 제한하는 조치가 진행되고 있다.
권력이 역사를 조작하는 방식은 언제나 비슷하다. 먼저 불편한 진실을 ‘과도한 강조’라고 규정한다. 그다음 ‘전체적 맥락’이라는 명분으로 특정 기록을 삭제한다. 마지막에는 ‘건전성’과 ‘진실’이라는 포장지로 왜곡된 서사를 완성한다.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그려낸 진리부의 작업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 기록의 삭제는 현재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의도적 조작이다. “노예제의 참혹함을 지우면 현재의 인종 불평등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민자의 기여를 삭제하면 배타적 정체성 정치가 정당화된다”고 전 남부빈곤법률센터(SPLC) 대표 마거릿 황은 지적한다. 과거의 차별을 은폐하면 현재의 차별이 더 쉽게 용인된다.
우리 한인들과 아시아계도 차별의 역사를 겪은 바 있다.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소 박물관(JANM)의 앤 버로우스 관장은 “1942년 아무도 일본계 미국인을 위해 나서지 않았던 침묵이 어떤 대가를 남겼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건국 250주년이 다가온다. 미국인들이 기념하고 싶은 것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노예제와 인종차별이라는 어두운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 기억을 지우는 권력은 결국 스스로를 지운다. 진실은 묻힐 수 있어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