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칠레에서 열린 지난 14일 대통령선거에 강경 보수 성향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후보(José Antonio Kast)가 승리했다. 카스트 후보는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군사정권을 옹호하는 극우주의자다.
피노체트 하면 ‘철권통치’ ‘독재자’ ‘학살’로 유명한 자이다. 군인 출신인 피노체트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1973년부터 1990년까지 17년 동안 독재하면서 자국민 3000여명 이상을 살해했다. 한국언론은 피노체트를 ‘인간백정’으로 불렀다. 아직도 행방을 찾을 수 없는 1000명은 불법감금과 고문의 피해자로 추정된다.
지금도 칠레에는 피노체트 독재정권의 유산이 남아 있다. 칠레 발파라이소(VALPARAISO, Chile)의 문화공원(Cultural Park)은 원래 군사정권의 감옥이었다. 피노체트 정권 말까지 이곳에서는 일반 범죄자와 정치범이 함께 수감되었다. 많은 이들이 고문당하고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1990년대 활동가들이 이곳을 점거해 지금의 문화센터로 만들었다고 라틴아메리카 사회법학연구센터의(CESJUL)의 알렉스 시에라(Alex Sierra)는 설명한다.
피노체트는 비록 민주화로 권좌에서 쫓겨났지만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고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그리고 피노체트의 악몽은 30년 후 카스트 후보의 승리로 되살아나려고 하고 있다. 이솔다 솔다드(Isolda Soledad) 씨는 “나는 독재정권의 생존자다. 아버지는 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당했고, 친척들은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거나 실종되었다”며 “증오를 내걸은 카스트의 승리는 극우의 부활”이라고 지적했다.
극우의 부활은 경제 문제로 시작됐다. 2019년 지하철 요금 인상 반대로 시작된 ‘사회적 폭발’은 불평등에 대한 전국적 저항으로 번졌다. 그 과정에서 500명에 가까운 시위자들이 눈에 부상을 입었다. 경찰이 의도적으로 시위자들의 눈을 겨냥해 발포했다는 증언이 이어지지만, 재판에 회부된 사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알렉스 시에라는 “젊은이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눈을 겨냥하는 전략을 칠레가 처음 고안했다”고 분석한다. 보는 것을 막아 저항을 원천봉쇄하려는 계산된 폭력이었다는 뜻이다. 시위 중 양쪽 눈을 잃고 후각까지 상실한 파비올라 캄피야이(Fabiola Campillai) 상원의원은 “우리는 모든 권리를 위해, 사회적 권리를 위해, 쓰러진 모든 사람들을 위해 계속 싸울 것”이라고 다짐한다.
카스트의 당선은 이런 맥락에서 더욱 섬뜩하다. 피노체트 독재를 옹호해온 그는 “전통적 가족가치” 복원을 내세우며 이민자 대량추방, LGBTQ 권리 후퇴, 낙태 접근권 제한 등 ‘도널드 트럼프 식 공약’을 내걸었다. 4년 내 10만 개의 감옥을 신설하겠다는 “철권통치” 공약도 제시했다.
문제는 칠레가 여전히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 중 하나라는 점이다.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아이티 출신 이민자 증가와 함께 범죄 양상이 변화했지만, 범죄율은 주변국보다 훨씬 낮다. 그럼에도 불안감이 극우 정치인의 승리로 이어진 것이다.
카스트의 칠레 대선 승리는 민주주의의 역설을 보여준다. 경제적 안정과 상대적 안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극우 정치인을 선택한 것이다. 불안감이 합리적 판단을 압도할 때,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교훈이다.
그런데 카스트의 승리가 과연 칠레만의 이야기인가. 전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미국에서도 극우 지도자가 이민자를 탓하는 정책을 내걸며, 국내 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내년 2026년에 열리는 중간선거에서 한인을 비롯한 유권자들이 민주주의에 기초한 투표를 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