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타운에 약속이 있어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뒤에서 남편이 “Friday the 13th 이니 다니며 운전 조심해” 주의를 줬다. 불운의 날이라는 그 말이 목줄기를 잡았지만 바로 잊어버렸다.
나에게는 한 버릇이 있다. 뭔가를 하다가, 무엇을 보다가, 혹은 누구와 말을 하거나 길을 걷다가 운전하다가 불쑥 떠오르는 단어, 그것을 잊기 전에 빠르게 작은 노트에 적거나 핸드폰에 적는다. 나중에 그 단어를 입안에 굴리며 두고두고 생각하며 내 나름의 답을 찾는다. 오래전 두터운 백과사전을 끼고 살았듯이 나는 그 단어와 유사한 단어의 의미와 실용에 대해서도 찾아보곤 한다.
내가 적은 단어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대부분 평소에 아는 평범한 단어들인데 어떤 순간에 내 머리에, 가슴에 별똥별로 떨어져 안긴 것들이다. 내 노트에 적힌 많은 단어들,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며 아무 의미 없는 그저 단어로 남지만 가끔 어떤 단어는 나의 우주에 흔적을 남긴다. 나의 이런 버릇을 아는 딸들은 어디서 작고 예쁜 노트북을 보면 사줘서 내 박스에 다양한 노트북이 평생 쓸 만큼 쌓여 있다.
지난달 나를 잡았던 ‘Blue Bird’는 완연한 봄이 되자 밀려났다. 최근의 단어는 운전하다가 들은 공영방송 NPR의 한 인터뷰를 통해서 찾아왔다. 여성의 날에 관한 대화였는데 말들 중에 ‘nothingness’ 단어가 나를 잡았다. 내가 허무주의자도 아닌데 왜 그 단어가 충격파가 되었는지 몰라서 그날부터 나는 이 단어에 잡혀 있었다. 계속 의문을 가지고 철학자 사르트르를 떠올리며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무엇,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무의 상태가 아니라 나 개인의 삶에서 이 단어는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했다.
어떤 날은 비존재의 반대어인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내 안에 만들고 그 안에 야생화가 화사한 들판을 들여놓기도 했고, 파도 소리가 젖은 모래성도 짓고 분수가 끼인 정원도 만들어 보면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여러 정경을 상상했다. 사실 존재 보다는 비존재가 더 흥미로운 단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존재를 나의 삶에 엮어서 이해해 보려는 내 노력이 실없는 놀이 같기도 했고 어쩌면 내가 풀 수 없는 어려운 수학문제처럼 보였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단어를 던져봤지만 누구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타인의 머리속을 헤집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단어의 텅 빈 감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진료실 대기실에서 오스트리아 출신 Leo Maasburg신부님이 쓰신 책을 읽다가 나를 옥죄던 단어가 불쑥 튀어나와서 내 눈이 확 떠졌다. 뜨거운 가슴에 손을 얹고 천천히 그 부분을 다시 읽었다. 가슴이 서늘한 순간이었다.
신부님은 마더 테레사의 가까운 친구였다. 마더 테레사가 생전에 가난한 자들을 돌볼 적에 그녀의 영적 고문이었고 통역가였으며 고백자로, 함께 여러 나라를 다니며 가까이서 수녀님과 나누었던 대화와 직접 목격하신 기적들을 2011년 책으로 발간하셨다. 20세기의 최대 거물이었던 한 수녀님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진목면을 따스하게 소개한 책을 읽으며 감동을 받던 중이었다. 책의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 마더 테레사가 “nothingness”를 언급하신 것이 있었다.
‘만약에 우리가 자신에 치중하거나 허영심과 개인적인 목표에만 집중하면서 우리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도울 수 없고 또한 사용하실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nothingness‘임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하느님을 향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고 우리와 위대한 일을 하도록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신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려는 완전한 복종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성녀의 조언이었다.
성녀 마더 테레사가 사순기에 준 선물, ‘nothingness’ 깨우침은 어리석은 나에게 주신 은혜였다. 내 가볍고 이기적인 사고로 어려운 문제라 여기고 고민했던 단어에 완벽하고 심오한 해석을 받고 한동안 복잡한 감정에 휩쓸렸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민망함에 내 몸은 자꾸 줄어들었지만 동시에 기뻤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었을까? 신의 한 수 같았다. 더구나 13일의 금요일, 불운하다는 날, 나는 분명 누군가의 축복을 받고 있음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