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에 ‘희년 (Jubilee Year 2025)’ 을 선포한 프란시스 교황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의 성스러운 문(Holy Door)을 열며 희년의 시작을 알렸다. 25년마다 돌아오는 가톨릭 희년은 신자들에게 죄사함과 신앙이 깊어지는 기회를 준다. 특히 이번 희년의 주제 ‘희망의 순례자들 (Pilgrims of Hope)’, 코비드를 겪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 문제까지 온통 어지러운 세상에 평화를 구하는 순례에 나도 참여하고 싶었다.
로마에 도착해서 고도시에서 보고 싶은 여러 관광지를 찾으며 동시에 성당을 찾아다녔다. 화씨 99도 기온에 전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붐비던 도시 어디나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앨라배마 여름에 익숙해서 더위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공식적인 순례지로 선정된 중심가에 있는 41 성당들 외에도 여기저기 거리에 성당들이 많았다. 걷다가 문이 열린 성전을 보면 내 등에 배낭은 없지만 스페인에서 순례길을 걷다가 성당에 들린 것처럼 무조건 들어가서 내가 희망의 순례자이고 평화를 구하는 한 사람이길 간절히 기도했다.
처음에는 각 성당의 독특함이나 천정의 프레스코화를 기억했지만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성당의 이름이나 내부 그림이 분리되지 않았다. 제각각 성전의 모습과 조각상들이 어울린 엄숙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본 많은 정경이 뒤섞여서 내 가슴과 머리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성전으로 재구성됐다. 그러나 천재적인 르네상스 화가와 조각가들의 절대적인 믿음과 열정에 충동을 받았고 또한 그들이 해석해준 놀라운 성경 스토리에 빠져서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계속 찾아 다녔다.
바티칸 시티에서는 하루를 보냈다. 우선 박물관을 보고 대성당을 찾으려고 예약된 아침시간에 박물관 입구로 갔다. 중세문화에 박사학위를 가진 안내자가 박물관 내부를 꽉 채운 수 세기에 걸친 눈부신 작품들을 골라 해준 설명을 듣고 감탄했지만 많은 사람들에 밀려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슬쩍 보고 안내자를 따라 다음 방으로 가야 해서 아쉬웠다. 신이 예술가들에게 부여한 재능의 극치를 보며 신과 인간, 종교와 예술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려 는데 땀으로 흥건한 내 몸을 가누기 벅찼다. 사람들에 밀리며 본 소매치기 조심하라던 글에 웃음도 나왔다.
박물관 관광의 마지막 장소인 시스틴 채플(Cistine Chapel)의 중앙에 서서 영적 기운으로 가득한 동서남북, 바닥과 천정을 둘러보며 완전히 압도 당했다. 미켈란젤로가 4년에 걸려서 혼자서 천정에 그린 창세기 스토리, ‘천지창조’는 낯익은 그림인데 실제를 보면서 경이감을 느꼈다. 그리고 역시 미켈란젤로가 그린 파격적인 디자인의 ‘최후의 심판’이 빛과 그림자로 나를 내려다 봐서 움칫했다. 마치 내 믿음이 도마위에 오른 기분이었다. 내 존재의 소소함은 해변의 모래알과 같았고 지나간 세월, 내가 살아온 기록은 천하에 공개된 듯했다. 아무튼 여러 화가들이 한쪽 벽에는 구약성경, 맞은쪽 벽에는 연관성 있는 신약성경 스토리를 그린 것까지 채플 전체가 기적이었다. 종교와 예술의 화합은 나를 둘러싼 동양과 서양, 피부색이나 모습이 다른 모두에게서 가장 인간적인 순간을 느끼게 해줬다.
박물관 안내 책자를 사고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었다. 성베드로 광장을 지나서 전세계 모든 가톨릭 교인들을 인도하는 총수격인 대성당의 활짝 열린 성스러운 문 앞에 섰다. 성스러운 문으로 대성당에 들어가면 나의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영적 여정을 시작한다고 기대하다가 내부의 어마어마한 규모와 방대한 작품들로 꽉 채워진 성전에서 내 오감이 멈춰버렸다. 더구나 입구 오른쪽에서 환하게 빛을 발하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에 가슴이 뭉클했다. 인상적인 건축물과 내부, 역시 세계 최고, 최대의 대성당이었다.
다음날 5세기 초에 설립된 성모 마리아의 대성당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Basilica of St. Mary Major) 대성전에서 미사를 보고 5개어를 하시는 노신부님 앞에서 고해 성사를 봤다. 그리고 지난 5월에 선종하신 프란시스 교황님을 가까이서 인사했다. 하얀 벽에 작은 은 조각 십자가, 역시 하얀 대리석에 이름만 새겨진 그분의 영원한 안식처는 겸손했다. 생전에 백 번 이상을 방문해서 기도하신 성모님 채플 옆에 쉬시니 편안하시리라. 대성당의 전망대에 올라가 정교한 모자이크 그림을 보고 그곳에서 안식하시는 8 교황님의 흔적을 따르다 돔을 둘러싸고 360도 돌며 늦은 오후의 평화로운 로마시의 정경을 보니 내 마음도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