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를 다녀온 후 감기에 심하게 걸렸다. 계속되는 기침과 콧물을 동반한 이번 감기는 삶의 질을 떨어뜨려 고생을 많이 했다. 코비드 이후 기침을 하면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외출이 조심스러웠다. 콧물까지 나오니 마스크를 쓰기도 불편했다. 보통 감기는 잘 먹고 푹 쉬면 나았는데, 이번에는 병원에 가서 주사도 맞고 처방약을 받아 복용해도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병원에서 검사 결과는 단순 감기 진단이었으나 변형된 코비드 바이러스였는지도 모르겠다.
즐거운 휴가 이후 계획에 없던 강제 집콕 생활이 시작되었다. 100도를 넘나드는 무더운 날씨에 오히려 잘됐다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집에서 하루 하루를 보냈다. 바쁘게 사느라 지나쳤던 많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먼지 소복한 장식장, 지저분한 것들을 숨기느라 서랍장 안에 넣어 두었던 잡동사니들, 쌓아두었던 광고지와 서류들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느긋하게 주어진 시간동안 집에서 외면했던 곳에 눈길을 주게 되니 매일보던 것들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여행하면서 모은 작은 소품들은 먼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나씩 꺼내어 닦아주니 빛이났다. 더 나아가 차분히 자리 잡고 앉아 여행 사진들도 찾아보고 지난 시간들을 회상해보며 미소 지었다. 선반에 쌓인 먼지도 털어주고 다시 배열해주니 다른 공간처럼 재탄생했다. 서랍 안에 안쓰던 물건들은 버리거나 도네이션했다. 청소와 정리로 깨끗해진 공간이 생기니 비록 잦은 기침으로 몸은 힘들었지만 정신은 맑아졌다.
무심코 집어 드는 TV 리모컨 대신에 밝아진 집안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보이게 정돈된 책들은 자기 존재를 뽐내며 선택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끌리는 책을 골라 기침에 좋은 따끈한 차 한 잔과 함께 내 지정 좌석에 앉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잔잔한 음악과 깨끗한 공간, 몸을 기댈수 있는 편안한 자리, 한 권의 책, 한 잔의 차.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지치고 아픈 몸이 이완되고 치유되는게 느껴졌다.
쉬는 동안 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중년을 맞이하는 마음 자세도 엿볼수 있었고, 여러 다채로운 처세술도 경험해보았다. 단편 소설에서는 가족을 생각하는 뼈를 깎는 아픔을 느꼈고, 절절한 연인간의 가슴 아린 사랑도 해보았다. 시집을 읽으면서는 함축된 단어 안에 숨겨진 뜻을 찾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 모습을 나름대로 그려보고 색칠해 보았다. 삐걱거리고 복잡했던 머리 속이 오랜만에 온화하게 작동했다. 외면하고 있었던 아날로그 감성이었다.
빠른 시대에 살아가는 요즘의 나는 새로 나오는 기계와 정보에는 열광하지만 오랜 시간 함께 해왔던 책은 멀리하는 추세다. 그 안에 다양한 지식과 간접 체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빠르게 잊어가는 중이다. 매일 새롭게 나오는 영상물들의 풍요 속에 찰나에 지나가는 자극적인 시각적 효과들 말고 글을 읽고 잠시 시간을 들여 곰곰히 생각해보는 느린 시간도 나에게 필요하다.
이번 감기는 지독하게도 근 한 달간 지속되었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느림의 미학을 느끼고 경험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던 나의 성향도 나이가 들면서 변해가는걸까? 느긋한 혼자만의 시간이 무척 특별하게 다가왔고, 새로운 하루에 무엇으로 채울까라는 생각에 설레었다. 무작정 외출하고 별 생각없이 흘려버린 시간들이 왜 그토록 많았던가 싶었다. 스스로에게 집중해보며 내가 가진 공간, 나의 역할, 나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소중하게 느껴진 시간들이었다.
몸이 아파서 머무른 집 안에서의 생활은 바빴던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양식을 채우라는 선물이었나보다. 이제는 불편하게도 돋보기를 찾아 써야 글씨가 보이지만, 다가올 선선한 가을에는 독서에 더 빠져보리라 다짐해 본다. 그 안에서 나는 상황에 맞는 지혜를 얻을테고, 인생의 다음 도전 과제를 찾을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때때로 잠시 멈춰 쉬어가는 시간을 마련해 정성을 들이면 분명 삶의 윤활유가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