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40)
오소리는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북아메리카에 널리 서식하며, 대개 산이나 들에 살며, 주로 낮에는 굴 안에서 쉬다가 어두워지면 활동을 시작하는 야행성 동물이다. 그래서 어두운 밤에 도로를 건너다 로드킬 당하는 오소리가 많다. 일생 동안, 숲속을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여러 동물들과 평화롭게 살다가, 늙어서 맞이하는 오소리의 죽음이라면 축복받은 죽음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영국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 가장 돋보이는 신인에게 주는 ‘마더 구스 상’을 수상한 작가, 수잔 발리의 <Badger‘s Parting Gifts>에 나오는 오소리는 자신이 너무 늙어서 이제 죽을 때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아는 오소리다. 누구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나 도와주었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믿고 의지했으며, 나이가 많아서 모르는 게 거의 없는 오소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죽는다는 것은 예전만큼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아서 몸을 두고 떠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었을 때, 친구들이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며 머지않아 긴 터널을 지나 갈 거라며, 마음 준비를 시킨다. 어느 날 저녁, 오소리는 편안히 흔들의자에 앉아 튼튼해진 자신의 다리로 긴 터널을 달려 나가는 꿈을 꾸며 영원히 잠든다.
오소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큰 슬픔을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흰 눈이 온 세상을 뒤덮는 겨울이 왔지만 오소리 친구들의 슬픔까지는 덮지 못하고, 그렇게 봄이 오고, 친구들은 때때로 한데 모여 오소리 이야기를 한다. 종이를 접어 두더지 모양 사슬 오리는 방법을 가르쳐 준 오소리, 스케이트 첫걸음을 떼도록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오소리,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 준 오소리, 생강빵을 만드는 자신만의 특별한 요리법을 가르쳐 준 오소리. 친구들은 각자 오소리가 남겨준 특별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친구들은 “오소리는 친구들에게 소중한 보물을 이별 선물로 주었는데, 이 선물은 다른 이에게 전해질 때마다 더욱 특별해졌어요.”라며 오소리의 이별 선물들을 함께 나누며, 이별의 슬픔을 감사와 행복으로 바꿔 나간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그림책,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은 사람을 위로하는 그림책…’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댓글은 모두 따뜻하다. 이런 온기를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배운 것을 다시 가르쳐 줄 수 있는 시간, 함께 기쁘고 아픈 이야기들을 나누고, 전달하고, 이어나갈 시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남은 사람에게 위로를 남길 수 있는 시간, 이런 시간을 넉넉하게 가진 후의 죽음이라면, 정말 축복받은 죽음이 아닐까?
고인이 천수를 누리다 큰 고통 없이 떠난 경우에 우리는 ’호상‘이라는 말을 쓴다. ’좋은 죽음‘이 있다면 ’나쁜 죽음‘도 있기 마련, 사고사나 자살, 타살, 돌연사, 전염병처럼 갑작스러운 죽음은 고인이나 남은 사람 모두 아무런 준비 없이 당하는 ’악상‘일 것이다. 갑작스럽지 않다 해도, 투병으로 고통스럽게 갔다든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간다면, 이보다 비통한 죽음이 없을 것이다. 이런 모든 형태의 악상이 날마다 일어나는 곳, 바로 전쟁터이다.
내 집 현관 앞에 커다란 집을 지은 불개미 군단을 없애려 할 때도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살충제를 뿌리면 바글바글 알을 물고 나오는 개미들에게 쭈뼛쭈뼛하게 된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든다. 어쩌다가 너희는 여기에 집을 지어서 나에게 이런 괴로움을 주냐고 물을 때, 개미도 아마 같은 물음을 나에게 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다가 그 시대, 그 장소에서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의 무참한 죽음과 살아남았다 해도 전쟁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지만, 하루빨리 과거의 기억에만 남은 전쟁이길 바라는 마음에 이렇게 기도 해본다.
기억은 힘이 세다. 오소리가 남긴 선물들은 모두 기억이다. 기억은 세대를 이어 영원히 이어질 수 있다. 누군가 억지로 기억을 왜곡시키거나 지우거나 한다면, 그 누군가는 하나의 세상을 부수고 죽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