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체육관이 잠시 문을 닫았다. 수리를 한다는 이유였다. 운동을 쉬기 싫어 다른 체육관을 찾았고, 낯선 공간에서 근육운동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여러 번 탁구장에서 마주쳤던 분이었다. 이름은 몰랐지만, 미국인들이 그를 “미스터 하하”라 부르는 통에 나도 그렇게 불렀다.
그날, 내가 다리 근육 운동 기구에 앉아 있을 때 그는 운동을 마친 듯 내 옆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예전엔 그저 공을 주고받으며 스쳐 지나갔을 뿐,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나는 늘 궁금했다. 왜 사람들은 그를 ‘미스터 하하’라 부를까? 그토록 잘 웃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어쩌다 ‘미스터 하하’가 되셨어요?” 내가 물었다. “하하하. 탁구장에서 내가 자꾸 하하 웃으니까,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그의 웃음 속엔 힘을 뺀 여유가 배어 있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잘 웃으세요?” “그럼요. 웃다 보면 주변도 같이 웃게 되니까요.” “어떻게 그렇게 웃는 사람이 되셨어요?”
나도 한때 웃는 연습을 한 적이 있다. 아침이면 손녀의 웃는 사진을 사무실 벽에 붙여놓고 보았다. 손녀의 웃는 얼굴을 따라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려 애썼다. 몇 년이나 해봤지만, 정작 운동 중에 하하 웃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공이 빗맞아도, 상대가 규칙을 어겨도, 게임에서 아쉽게 진 순간에도 하하 웃었다.
그의 대답은 조금 뜻밖이었다. “찬송가 덕분일 거예요.” “찬송가 때문이라니 요?” 한 번도 그가 잘 믿는 교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더 궁금해졌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미국에 와서 30년 가까이 트럭운전을 하다가 은퇴했다고 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대형 트럭을 몰며 미국 전역을 누볐다. 새벽 어스름, 텅 빈 고속도로 위를 홀로 달릴 때, 졸음을 쫓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처음엔 유행가도 불렀고, 찬송가도 흥얼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찬송가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어두운 하이웨이, 핸들 위에 얹힌 두 손, 그 위를 덮는 찬송의 가사. 노래를 부르다 보면 마음이 고요해졌고, 때론 운전석 옆에 성령님이 함께 계신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이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그는 찬송을 부르며 하늘의 평안을 느꼈다. 근심이 사라지고, 걱정이 비워지자, 그 자리를 웃음이 채웠다. 식당에서 만난 낯선 운전자에게도, 정류장에서 만난 피곤한 동료에게도 그는 웃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기쁨이 땅 위의 일상 속으로 번져 나갔다.
이제 그는 은퇴했고, 탁구를 즐긴다. 예전처럼 웃는다. 아니, 더 깊고 따뜻하게 웃는다. 웃음은 탁구장에 퍼졌고, 사람들은 그를 ‘미스터 하하’라 불렀다.
“다음 학기 시니어 대학엔 어떤 수업 들어요?” 내가 물었다. “노래 마을이요.” “어머! 나도 그 수업 들어요! 같이 노래 부르겠네요.”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호킨스는 과학적인 측면으로 우리의 의식이 진화하고 성숙하면 지상에 살아도 하늘의 평안을 누린다고 한다. 교회에서도 찬송가 가사에 믿음으로 거듭나면 하늘의 평화를 이세상 살면서도 이룬다고 하고, 성령의 열매가 익은 자는 가슴에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온다고 했다.
그런데 미스터 하하는 트럭운전을 하며 찬송가만 부르고 또 부르고 반복하다 보니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늘 나라를 지상에서 경험하며, 평안과 웃음으로 사는 것 같다. 찬송가만 열심히 몇 십년 불러도 그런 경험을 하다니, 높은 수준으로 성숙되는 과정도 다양하구나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