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끝난 줄 알았는데 뜻밖의 부록이 펼쳐질 때가 있다. 요즘의 내 삶이 그렇다. 새롭게 펼쳐지는 부록 같은 날들은 또 다른 빛깔로 다가오고 있다.
예전에 보았던 월간미술 잡지가 떠오른다. 가끔 별책 부록과 함께 받을 때면, 선물 받고 들뜬 아이처럼 기분이 좋았다. 전시 일정과 작가 소개, 작품 사진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늘 먼저 손이 갔다. 내게 ‘부록’ 이라는 단어 뒤에는 반가움과 설렘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까지, 매달 서점에 들러 미술잡지를 사다 주던 남편의 작은 행복이 그 감정을 더 짙게 만들었다. 정기구독을 할 수도 있었지만, 발행일에 맞춰 직접 서점에 가는 일이 좋다고 했다. 소소하지만 감사한 이벤트였고, 나는 매달 찾아오는 그 기다림이 좋았다.
나에게 부록 같은 삶을 느끼게 해 준 한 분이 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이제 막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뜻밖에 받은 한 통의 편지는 오랜 시간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편지는 시아버님의 사촌,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견 화가분이 보낸 것이었다. 일본에 다니러 가셨던 아버님이 내가 그림 그린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그분은 반가워하며 일면식도 없는 내게 정성스러운 글과 함께 책과 물감을 보내주셨다. 일본어로 된 편지를 아버님이 한글로 옮겨 적어 주셨는데, 그 순간의 감동이 지금도 손끝에 남아 있다.
그분은 편지에서 ‘나는 그림 그리는 화가입니다’ 라고 자신를 소개하려면 예순이 넘은 후에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붓을 놓지 않고 열심히 작업해야 하며, 세상 사는 일과 건강을 지키는 일에도 소홀하면 안 된다고. 뜻이 맞는 벗들과 전시회를 준비하며 꿈과 기대에 부풀어 있던 나에게 그 말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육십’이라는 숫자는 내 마음속 깊이 남았다. 언제나 교만을 버리고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는 다짐처럼. 그 뒤로도 몇 번 재료를 보내주셨고, 개인전 도록과 함께 그림 한 점을 선물해 주셨다. 응원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아버님께 전해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존경심이 생겼다.
인생의 깊이가 생겼을 때, 비로소 그림도 무르익는 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 싶다. 겹겹이 쌓인 세월에 내면의 빛깔이 드러나듯, 삶의 무게를 견디며 얻는 성숙함 이야말로 작품에 스며드는 가장 큰 힘일 것이다. 벽에 걸린 그 분의 그림은 단순한 선물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내 작업실의 이정표이자, 작가의 길을 향한 묵묵한 격려였으며, 마음을 곧게 세워주는 침묵의 목소리였다. 멀게만 보이던 예순의 문턱을 넘었을 때, 비로소 그 뜻이 깊이 다가왔다. 삶의 맛이 깊어 졌고, 하루하루가 새로운 인생처럼 느껴졌다. 앞만보고 달리던 때와 달리, 노란 불이 켜진 신호등 앞에 잠시 서 있는 듯한 시간. 멈춤이 다음 걸음을 준비하는 고요함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터 인가 노후를 준비하고, 남은 삶을 하나씩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병을 앓고 난 뒤생각이 달라졌다. 삶이 한 번 접힌 듯한 그 시간을 지나자, 매일이 덤처럼 다가왔다. 죽음의 그림자가 스쳐간 이후, 삶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물이었다. 이제 나는 마침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부록 같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다. 시작과 마침은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다. 자서전의 결말을 향했던 마음이 끝을 바라본다면, 부록은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다.
지금의 내 삶은 덤으로 얻은 선물인 듯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다가온다. 스치는 바람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사소한 풍경에도 감동이 밀려든다. 살아 가는 그 자체가 이미 특별한 선물이기에, 나는 오늘도 부록의 한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새롭게 써 내려간다. 책의 부록이 주는 기쁨이 특별했던 것처럼, 내 인생의 부록도 단순하고 멋지게, 그리고 저 멀리서 반짝이는 깊은 빛을 향해 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