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에 멕다니엘 공원을 걸었다. 떨어진 낙엽들이 포장도로 위에 널렸다. 공중에서 낙엽이 빙글빙글 돌며 내려와 하늘을 쳐다보니, 높은 나뭇가지들 사이에 누렇게 변해 성글어진 나뭇잎들 사이로 하늘 조각이 새파랗게 돋보인다.
걷는 길바닥 위에 야생 포도 머스카다인 알들이 떨어져 발에 밟혀 시꺼먼 자국이 포장도로 위에 번졌다. 밟히지 않은 야생 포도 열매가 검은 유리구슬 같은 알로 여기저기 있다. 발에 밟혀 뭉그러진 자국들만 아니라면 검은 구슬 같은 포도알을 주워 씻어 먹어 보겠지만 그냥 지나친다. 새나 사슴이 먹고 배설하여 씨를 다른 곳에 전달할 지 모른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는다. 개와 같이 걷는 사람, 양산을 쓰고 걷는 사람, 애들을 수레에 태워 미는 분도 있다. 길가에 선 야생 감나무를 올려다보니 노란 탁구공 같은, 그러나 크기는 작은 고염 열매들이 오롱조롱 가지에 매달려 있다. 풀섶에 떨어진 한 알을 주워 맛을 보니 달콤하다. 씨는 뱉어 들에 뿌린다. 여기 저기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걷다 보니 가래추자나무 아래에는 가래추자들이, 피칸나무 아래에는 피칸들이 떨어져 길가에 널려 있다. 한국 시골에 살던 어린 시절엔 산에서 가래추자(미국 이름은 몽고 호두)를 한 자루 주워 와 껍질을 벗기고 물에 씻어 두었다가 망치로 깨서 먹기도 하고, 두 알씩 손바닥에 넣고 비벼 손바닥 운동을 하던 생각이 났다. 풀만 자라는 빈터에 내 키보다 큰 풀들 중에 하얀 꽃에서 민들레 씨처럼 솜털을 단 씨들이 산들바람에 하나씩 날리기도 하고, 벼 이삭 같은 씨들이 흔들린다. 풀 속에 작은 하얀 꽃, 노란 꽃, 불은 꽃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둘러보면 이 가을에 이름 모를 수많은 야생 꽃들이 가을 햇살에 씨들을 익혀간다.
공원 언덕 위에 하얗게 서 있는 옛 농가 집 앞 큰 밤나무 밑에는 밤송이들이 떨어져 흩어져 있다. 밤송이는 전부 빈 껍질뿐이다. 밤알을 찾아 빈껍질을 발로 굴리던 한 여자분이 중얼거린다. “몇 개는 남겨둬야 뒤에 오는 사람들도 찾는 재미가 있을 터인데, 몽땅 가져가 버렸네!”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이 났다. 밤을 한 톨이라도 내가 찾으면 뒤에 올 사람을 위해 남겨둘 수 있을까? 나라도 안 그럴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 위에 서서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을 본다. 낙엽들은 물 위에 떠 흘러간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개울 가장자리와 물에 걸린 나뭇가지에 걸려 여기저기 쌓여 있다. 개울을 따라 가장자리에 늘어선 나무들의 잎사귀는 그렇게 개울물을 타고 강으로, 호수로, 바다로 흘러가 갯벌 생명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새 사진을 찍는 백인 남녀 한 쌍이 큰 카메라를 들고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온다. “요즈음은 어떤 새들을 이 공원에서 많이 보세요?” “요즈음은 워블러들이 이 지역에 많아요.” 여자분이 친절하게 그들이 찍은 새 사진을 보여 준다. 노랑, 검정, 잿빛의 깃털을 한 작은 참새 같은 모양의 휘파람새들이다. 워블러도 계절 따라 먹이를 따라 이동하는데, 지금은 멕다니엘 공원에서 제일 많이 보이지만 더 추워지면 남쪽으로 이동할 거라고 한다.
모택동 혁명 때 중국에서 참새 박멸을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 그들에게 했다. 곡식을 축내는 인민의 적으로 참새를 없애자고 전국민이 나서 박멸했는데, 다음 해에 참새들이 잡아먹던 메뚜기 등 곤충이 지나치게 늘어나 농작물 피해가 오히려 더 커졌다. 그들은 생각을 고쳐 소련에서 참새를 수입했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실험을 통해 생물들은 모두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자연의 질서를 극적으로 증명했네요.”
“새들을 찾아 사진을 찍다 보면, 새들에게서도 배울 게 많지요?” “그럼요. 새들의 먹이 사슬, 계절 변화에의 적응, 공동체와 협력 등, 자연의 슬기와 지혜를 배우기도 하지요.”
개들의 놀이터 뒤 황토길을 걸었다. 한국 사람들이 만든 황토길은 쓰러진 나뭇가지들을 모아 길 가장자리를 만들고 황토를 고르게 다져 정리해 두었다. 역시 한국 사람들은 열성이 대단하다.
가을의 멕다니엘 공원을 걸으며 작고 큰 생명들이 모두 서로 어울려 도우며 가을을 맞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통한 한 해의 순환이 백 번, 천 번, 만 번, 수억 번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그들은 꾸준히 삶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학 것이 틀림없다. 한 해를 살다 죽는 풀이나 몇 백 년을 살다 쓰러지는 나무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는 나나, 우리는 모두 어울려 큰 질서 속에서 영원으로 이어지고, 지금 가을의 한 순간을 같이 누리는 이 순간이 귀중하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