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하늘과 적당히 차가운 날씨의 가을 시작이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여 전날 싸놓은 짐과 함께 차에 올랐다. 집에 남겨두는 남편과 막내에게 무사히 잘 다녀오겠노라는 비장한 각오를 전하고 출발했다.
며칠 전 타주에서 직장 생활하는 큰 아이가 공연을 보려 친구와 계획했었지만 일이 생긴 친구가 못 가게 되었다고 속상해했었다. 무척 아쉬워하며 힘빠진 아이를 위로해 주려, “나랑 같이 갈까?”는 말을 무심결에 했다. 예상외로 “엄마 갈 수 있어? 시간돼? 같이 갈래?” 물으며 삽시간에 흥분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마음이 느껴져 귀여웠다. 그날 저녁, 남편과 이야기하다 혼자라도 괜찮으면 다녀오라는 말에 계획은 갑자기 진행되었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바로 옆 주에 살고 있는데, 작은 아이가 다니는 학교 도시에서 공연이 열려 같이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문제는 나 홀로 미국 국내선 비행기 여행은 처음이라는 점이었다. 잦은 출장으로 공항이 익숙한 남편을 따라다니기만 했을 뿐 내가 주체적으로 다녀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다른 용기가 불끈 솟아올랐다. 집 떠나 생활하는 아이들과 만날 시간이 점점 없어져 안타까웠는데, 이런 좋은 계절에 찾아가는 깜짝 여행이라니 가슴이 뛰었다. 여행은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여행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짐을 챙기며 바빠지는 것 모두 신이 났다. 비행기 티켓, 호텔 예약도 꼼꼼히 살피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함께 갈 곳도 찾아보고 맛집도 알아보았다.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가로수 길을 따라 경치를 즐기고 노래 부르다 보니, 어느새 공항 이정표가 보이고 떨리는 마음에 양 볼이 상기되었다. 지난 밤, 혼자 가보라고는 했지만 걱정스러웠는지 지도를 펼쳐놓고 주차하는 곳, 애틀랜타 공항까지 미리 브리핑을 해주고 언제든 필요하면 전화하라는 남편의 뒷받침이 힘이 되었다. 그런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예약해 둔 시설에 성공적으로 주차했고, 이름도 예쁜 Sky Train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속으로는 처음이라 두근두근 했지만 표정은 능숙한 척했다. 아무도 관심도 없는데, 갓 상경해 촌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니 웃음이 났다.
‘이제 진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는 건가?’ 물론 도착지에 가면 아이들이 나오겠지만 이것도 나에게는 작지만 큰 도전이었다. 아이디와 미리 체크인해둔 비행기 티켓이 들어있는 핸드폰을 놓칠세라 꼭 쥐고 보안 검색 대기줄에 기다렸다. 앞사람을 곁눈질해가며 눈으로 익히고, 차례가 오자 익숙한 듯 캐리어를 검색대 통과용 바구니에 넣고, 소지품이 들어있는 가방도 따로 담았다. 염려 속에서도 나름 연륜을 발휘해 무사히 통과하니, 드디어 창 너머로 비행기가 즐비하고 탑승객들이 붐비는 터미널에 도착했다.
서투른 공항 이용법에 당황할까 싶어 일찍 서둘렀던 터라 시간과 마음이 여유로웠다. 천천히 걸어 다니며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공항 패션이며 온갖 여행지 스티커로 도배한 캐리어 구경도 흥미롭게 봤다. 그냥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겠지 하며 이끌려간 곳에는 아티스트가 직접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해 주는 Live Bar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착석해 작은 생맥주 한 잔에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며 황홀한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혹시 게이트가 바뀌진 않을지 티켓을 확인하며 시간에 맞춰 게이트까지 잘 찾아가 대기했다.
탑승 시간이 되자 승객들이 줄을 서고 서서히 들어갔다. 티켓을 검사하고 비행기에 올라 좌석을 확인한 후, 캐리어를 머리 위 선반에 번쩍 들어 올리고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내가 할 일은 무사히 마쳤다’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쉬었다. 다행히도 연착되지 않고 정시에 이륙했다. 이번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듯 비행기는 땅을 박차고 비상했다.
도착지에 마중 나온 아이들에게, “얘들아, 엄마 혼자 비행기 여행에 성공했다. 이제 어디든 갈 수 있어!”하며 자랑하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어릴 적 엄마인 내가 했듯 “참 잘했어요!”를 외치고 손바닥에 칭찬 도장을 찍어주었다. 이젠 아이들을 다 키우고 아직 덜 성장한 내가 클 차례이다. 이번 여행은 한 뼘은 더 자란 엄마의 성장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