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전, 일정과 책임을 완벽하게 챙기려 했던 나는 마치 작은 그릇에 무언가를 채우려 전전긍긍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어디에 놓아도 쓸모 있고 흠집 하나 없는, 누구나 좋아하는 매끄러운 그릇이 되려 애쓰며 살아온 듯하다. 하지만 흠집을 감추려 노력할수록 삶은 더 고단해졌고, 그 무게는 나이가 들수록 힘에 부쳤다. 이번 여행을 앞두고 유독 마음의 짐이 컸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정 있는 여성들이 함께 모여 훌쩍 여행을 떠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오래전부터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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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타운에 약속이 있어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뒤에서 남편이 “Friday the 13th 이니 다니며 운전 조심해” 주의를 줬다. 불운의 날이라는 그 말이 목줄기를 잡았지만 바로 잊어버렸다. 나에게는 한 버릇이 있다. 뭔가를 하다가, 무엇을 보다가, 혹은 누구와 말을 하거나 길을 걷다가 운전하다가 불쑥 떠오르는 단어, 그것을 잊기 전에 빠르게 작은 노트에 적거나 핸드폰에 적는다. 나중에 그 단어를 입안에 굴리며 두고두고 생각하며 내 나름의 답을 찾는다. 오래전 두터운 백과사전을 끼고 살았듯이 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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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인이라는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타인과 부딪히며, 함께 웃고 울며,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그 과정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깊은 상처를 남기는 갈등과 오해도 겪는다.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고, 서로를 비난하며 등을 돌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바로 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경험한다. 이런 과정을 ‘거울 자아’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거울 앞에서 모양을 다듬듯, 타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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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슬한 달밤이면 무슨 생각 하시나요 / 뒤척이는 잠자리엔 꿈인 듯 생시인 듯 / 묻노니 그대여 때로는 제 말씀도 적어보나요 / 이승에서 맺은 인연 믿어도 좋을까요... 황진이의 ‘월야사’다.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남녀간의 그리는 정은 다를 바 없음을 느끼게 한다. 일부종사할 수 없는 자기의 운명을 깨닫고 스스로 기생이 되기는 하였으나 같잖은 한량들의 노류장화(路柳墻花)가 되기는 싫었다. 시와 음률을 아는 풍류남아만을 가려서 사귀었던 황진이가 편력했던 남성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인물은 아마도 양곡 소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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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차례 기고를 통해 K-푸드가 반짝이는 한류 트렌드를 넘어 세계인의 일상에 뿌리내리는 식관습으로 진화해야 함을 역설하고, 그 첫 번째 실천 과제로 현장 중심의 ‘식자재 물류 거점 구축’을 제안한 바 있다. 이번에는 K-푸드가 현지인의 뼛속까지 스며들게 할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무기, 바로 ‘주류 사회 급식(Institutional Catering) 시장 진출’에 대한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미국 사회를 보라. 이탈리아의 피자, 멕시코의 타코, 심지어 치킨 너겟이 어떻게 미국인들의 완벽한 소울푸드이자 일상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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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한 주 동안 나에게 일어난 일 중에서 어려웠던 일과 감사한 일을 나눠 보세요.” 그것이 교회의 노인대학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 토크의 주제였다. 내가 앉은 원탁 테이블에는 여섯 명의 남자 노인들이 둘러앉아, 한 사람씩 돌아가며 한 주간에 일어났던 어려웠던 일과 감사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지난주에는 날씨가 피클볼 치기 좋은 날씨였어요. 친구들은 모여 즐겁게 피클볼을 치는데, 나는 몸이 좀 불편해서 운동을 못 하고 옆에서 보고만 있으려니 속상하더라고요. 제가 감사하게 생각한 것은, 은퇴하고 금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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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부터 나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좋아하는 지인들이 속해 있던 모임이라 관심 있게 듣다가 함께 해보고 싶은 마음에 동참하게 되었다. 문학회라니. 내가 살고 있는 몽고메리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취미 생활이 낯설었지만, 차분한 깊이감이 매력적이었다. 스마트폰과 넷플릭스에 빠져드는 빠른 문화 속에서 잠시 벗어나 아날로그 감성으로 돌아가는 시간, 조금은 느리지만 내면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다가갔다. 우리 문학회는 4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되어 있고, 여러 이력과 재능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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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으로 인생 배우기 (49) 친구와 우정이라는 주제를 특유의 따스한 시선으로 들려주는 작가, 베스 페리의 그림책 'A Small Blue Whale'의 첫 장은 ‘작고 파란 고래가 있었어요’로 시작된다. ‘Blue Whale’은 흰긴수염고래 또는 대왕고래로 불리는 평균 몸길이가 20~30미터나 되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다. 그런데 왜 ‘작고 파란 고래’일까? ‘Blue Whale’은 회색빛 몸이 물속에서 보면 푸르게 보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흰긴수염고래’는 고래의 입안에 있는 먹이를 걸러내는 수염판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일본의 한자를 오역하여 붙여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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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안동시 정상동 택지개발지구에서 이름 모를 무덤을 이장하는 중에 미이라 한 구가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시신을 보호하는 외관을 보고 ​최근의 무덤이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발굴작업이 진행되자 400여년 전 조선시대의 무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덤 속에서 온전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옷가지와 여러가지 소품들 중에 요절한 남편을 그리는 애절한 사연이 담긴 아내의 편지와 남편의 회복을 기원하는 미투리가 발견되었다. 남편이 젊은 나이(31세)에 병석에 눕자 아내(원이엄마)는 남편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엮어 정성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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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월 1일, 김포공항에서 33살의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길에 나를 보러 온 친척분들에게 허리 굽혀 작별의 절을 하고 돌아서서 비행기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사닥다리처럼 생긴 계단을 올라가다가 친척들 속에 서 있을 아내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아 그냥 비행기 문으로 들어갔다. 유학을 가게 한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석사학위를 하고 교육대학 연수원 전임강사를 하다 보니 박사학위가 없으면 교수 자리를 잡기가 어려운 시절로 변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온 분들 중에는 식당에서 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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