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셔츠에 정장 바지, 벨트까지 둘러주고 방을 나서 화장실로 향한다. 파마한 머리에 헤어 왁스를 슬쩍 발라주고 억지로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연출을 하고서야 멋쩍게 걸어 나온다. 마지막으로 마치 옛날 남성복 광고에서 연예인이 공중에 한번 날리고 입듯이 재킷을 걸치고 아빠의 정장 구두로 패션을 완성해 준다. “이따 만나요”라고 짧은 인사를 건네며 윙크를 찡긋하더니 차를 몰고 먼저 집을 나선다. 이렇게 수트를 차려입으니 철없던 막내아들이 제법 어른으로 성장한 듯하다. 웃음기 있는 baby face가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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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수감사주일에 아내와 함께 몽고메리에 사는 아들 집에 가서 며칠을 함께 지냈다. 방에서 짐을 풀다가 손녀의 서가에 붙어있는 종이 한 장에 눈길이 멎었다. 손녀가 중학교 2학년 때 600 페이지가 넘는 판타지 소설을 썼다는 얘기를 듣고 써준 격려의 편지였다. 영문으로 번역한 또 한 장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손녀가 할아버지의 편지를 이렇게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줄이야...가슴이 뭉클했다. 대충 이런 내용의 글이었다. “네가 소설을 썼다니 그저 놀랍고 기쁘다. 축하한다. 우리 손녀의 첫 작품을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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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속에는 자신과 타인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심리가 늘 존재한다. 특히 자신보다 더 나은 상황이나 성과를 가진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상향 비교는 종종 후회와 아쉬움을 동반하곤 한다. 예를 들어, 스포츠 경기에서 은메달리스트의 심리가 그러하다. 그들의 시선은 거의 손에 넣을 뻔했던 금메달에 고정되어,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거의 다 잡았는데..., 와 같은 후회의 감정을 느끼며 은메달을 금메달의 상실로 인식하게 된다. 식당에서 내가 주문한 김치찌개는 평범해 보이는데 유독 친구의 된장찌개가 더 구수하고 맛있어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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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은 한 사람의 일생에 소중하고 특별한 성인식인데 이것을 3번째 치르는 지인 부부가 있다. 검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변한 여인은 사실 봄부터 이 결혼식 준비로 무척 바빴다. 여름에 그들의 청첩장을 받고 나는 그들은 결혼예식을 몇 번 치루어야 사랑을 확인하는 건가? 아니면 아직 함께 살고 있음을, 살아있음을 증언하고 싶은 것일까? 몰랐다. 처음 몽고메리로 왔던 1993년, 우리 가족은 한인들이 별로 없던 이곳에서 활동하던 동양인 이민자들과 만났다. 어른들 나이나 초등학생들인 아이들의 나이가 비슷해서 자연스럽게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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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숲속을 걸었다 잎맥 사이를 걷다 보면 숨소리가 닿는다 뜨거운 한철을 보낸 잎새들 진액은 다 빠져 푸르렀던 생의 무늬 누렇게 떠 퍼덕이고 있다 오랜 기도처럼 간신히 잡고 있던 숨의 흔적 곁눈질 한번 못하고 쭉정이가 되어 버린 꿈 스스로 지우며 늘 아래를 보고 있다 귓볼이 뜨거워지도록 녹슨 달팽이관을 세우며 가지 하나의 흔들림에도 찬바람이 서리는 늙은 어머니 늦가을의 숲은 그녀의 등처럼 야위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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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중순, 단풍이 찬란히 빛나는 청명한 가을날, 닥터 Y가 자신의 별장 보러 가자고 10시 반에 내가 사는 콘도로 왔다. 나는 그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사이버트럭은 스스로 85번 하이웨이에 진입해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차가 자율주행으로 달리는 사이, 그는 존 덴버의 옛 노래 ‘Country Roads, Take Me Home’을 틀었다. 우리 둘은 목청 높여 노래를 따라 불렀다. “Almost heaven, West Virginia… Country roads, take me home/To the place I belong…” 노래를 부르니,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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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뉴올리언스에서 동북쪽으로 뻗은 낯선 길로 들어섰다. P는 I-10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 사용하던 옛길이라고 알려주었다. 한적한 도로였다. 얼마 지나 좁고 녹슨 다리를 건넜다. 곧이어 나무 방파제가 있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나무 방파제는 낡았고 갓길에는 쓰레기가 너저분했다. 보통은 이곳에 차를 세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지도를 살펴보니 그곳은 물이 폰차트레인 호수에서 보른 호수로 흘러가는 길목이었다. 낚시꾼에게는 특별한 곳이었다. P부부는 해 뜰 무렵과 해 질 무렵에 물고기가 잘 잡힌다고 이구동성으로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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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19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 달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실은 간혹 달의 뒷면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앞면이 거짓은 아니다.” 우리가 앞면만 보고 진실을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순간, 나머지 절반의 진실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영화는 시작된다. 넷플릭스에서 2025년에 개봉 된 따끈한 신작인 이 영화는 풍자와 패러디가 혼합된 블랙코미디물이다. 우리가 보는 뉴스는 진실일까 아니면 그저 보기 좋게 편집된 ‘좋은 뉴스’일 뿐일까? 영화의 제목이 주는 굿뉴스라는 뉘앙스에서 우리는 왠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영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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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때에는 꼭 동네를 산책하는 것이 오랜 습관이다. 오늘도 동네를 한 바퀴 돌다가 우연히 워커에 의지해 걷고 있는 바람개비 할머니를 또 만났다. 할머니의 느릿한 걸음에 비해 워커에 달린 바람개비는 씽씽 돌아가는 것이 재미있어서 내가 붙여드린 별명이다. “어머니, 바람개비는 오늘도 쌩쌩 참 신나게 도네요.” 할머니는 연한 미소를 지었다.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다보니 할머니와 나는 어느새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워커에 늘 달고 다니는 바람개비는 버지니아를 떠날 때 교회 어린이들이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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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 놓은 쓰봉 속주머니에 십만원이 있다”/병원에 입원하자마자 무슨 큰 비밀이라도 일러 주듯이/엄마는 누나에게 말했다/속곳 깊숙이 감춰 놓은 빳빳한 엄마 재산 십만원/만원은 손주들 오면 주고 싶었고/만원은 누나 반찬값 없을 때 내놓고 싶었고/나머지는 약값 모자랄 때 쓰려 했던/엄마 전 재산 십만 원...“ 권대웅 시인의 ‘쓰봉 속 십만 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에 초연할 수는 없다. 사내의 삶은 쉽지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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